인간과 천상을 감동시키는 장엄한 합창

알쏭달쏭 불교생활탐구 / 예불

2011-01-24     불광출판사

다게(茶偈, 부처님께 차를 올리며 읊는 게송)의 선송(先誦)에 이어 대중이 함께 창송을 하면서 드리는 우리나라의 새벽예불은 너무나 장엄하다.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한없는 감정의 떨림이 온몸에 전율을 동반한 희열로 확장된다. 산을 일깨운 범종소리와 함께 산사의 새벽은 맑은 향기로 가득 하고, 그 순간은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순수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사찰의 하루는 도량석(道場釋)과 종송(鍾頌)에 이어 대중이 큰 법당에 모여 새벽예불을 드림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불은 불교의 모든 의식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으로, 부처님께 지극한 예를 올리면서 받드는 엄숙한 의식이다. 사찰의 일과 가운데 대중이 다함께 참석하는 예불 의식으로 인해 승가(僧伽)의 생명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행과 신앙의 근본을 상징하는 의례 중의 의례인 예불로부터 사찰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예불은 항상 수행의 기본자세를 가다듬는 의식으로 일상 속에서 생활화되고 있다. 하루 두 차례, 조석으로 드리는 예불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종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릴리젼(Religion, 종교)의 어원은 라틴어 릴리지오(Religio)에서 왔는데, ‘Religio’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儀禮) 등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종교란 말의 뜻을 예경(禮敬) 또는 결합(結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인간이 초인간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해 예배하는 것이며, 또 그 존재와 인간을 결합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마다 그 교조에게 바치는 예배는 그 종교를 신앙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하는 예불
우리나라 사찰의 예불은 대중이 함께 합창을 하듯 곡조를 이루어 행해진다. 먼저 향로에 향을 피워 꽂아놓고, 새벽에는 다기에 청수(淸水)를 올려 다게를 선송하고 정례(頂禮)에 들어가며, 저녁에는 오분향(五分香)을 송하면서 헌향진언을 선송하고 정례에 들어간다.
오분향이란, 부처님의 법신을 다섯 부분으로 나눠 오분법신이라 하는데 이를 향에 비유해 오분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향(戒香)은 계학(戒學)을, 정향(定香)은 정학(定學)을, 혜향(慧香)은 혜학(慧學)을 지칭한다. 즉 삼학(三學)을 뜻하는 것이다. 해탈향(解脫香)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자재를 말하고,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은 해탈하여 자재를 얻은 분상에서 얻어지는 알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삼학은 불교수행의 근본 골격이라 할 수 있다.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윤리적 지침이 계가 되고, 이 계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는 것이 정이며, 다시 정을 얻었을 때 완성된 지혜를 얻어 수행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오분향을 할 때는 삼보에 올리는 공양송과 헌향진언(獻香眞言)을 한다. 헌향진언은 향을 올리는 진언으로 “옴 바아라 도비야 훔”이라는 진언이다. 여기서 ‘옴’은 모든 진언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소리의 원음인 아·오·마의 합성음으로 일종의 감탄사 역할을 하는 말이다. ‘바아라’는 ‘바즈라(Vajra)’의 변형된 말로 금강(金剛)을 뜻하며, ‘도비야’는 ‘소향존(燒香尊, 향을 태우는 분)에게’라는 뜻이다. ‘훔’은 진언의 끝에 붙는 말로 청정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헌향진언을 굳이 우리말로 바꿔본다면, “아! 금강과 같은 향을 태우는 분께서 이 세상을 청정하게 하시나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공덕을 향에 비유하여 찬탄하는 말이다.
헌향진언이 끝나면 “지극한 마음으로 몸과 목숨을 바쳐 돌아가 의지하나이다.”라는 뜻의 ‘지심귀명례’를 하면서 큰절이 시작된다. 보통 7정례라 하여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일곱 차례 올린다. 오체투지는 불교의 절하는 법으로서 두 무릎과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고 하는 큰절을 일컫는다.
예불문의 내용은 불(佛)·법(法)·승(僧) 삼보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귀의하고 찬탄하고 발원하는 내용이다. 이런 예불의 참뜻은 법을 바로 아는 데 있다. 법신을 바로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상적광토가 열리는 순간
『잡아함경』에 들어 있는 「발가리경(跋迦梨經)」이란 소경(小經)이 있다. 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박칼리라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었다. 그는 사위성에 살던 브라만 출신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뵙고 싶어 출가해 불교교단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부처님의 육신에 대한 집착이 강해 항상 부처님 곁에 있기를 좋아했다. 부처님은 그를 깨우치려는 방편으로 교단에서 떠나도록 명했다. 이에 박칼리는 부처님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데 낙심을 해 자살을 결심한다. 그가 자살을 결행하려고 할 때, 갑자기 부처님이 나타나 육신의 무상함을 설하자 박칼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발가리경(跋迦梨經)」에는 그가 왕사성 금사정사에 있으면서 병을 앓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 부린니가 박칼리를 돌보고 있었는데, 박칼리가 부린니에게 부탁을 한다. 자기 대신 부처님을 찾아가 예배드리고 문안을 여쭌 후, 자신이 꼭 부처님을 뵙고 싶으나 병 때문에 갈 수가 없으니 부처님께 금사정사로 와 달라는 청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부처님이 박칼리를 찾아 금사정사로 오게 되었다. 부처님이 오시자 누워 있던 박칼리가 몸을 일으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를 본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박칼리여! 썩어 없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하는 것보다 법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내 몸을 보고 예배하지 않아도 법을 바로 보면, 그것이 육신에 예배하는 것보다 더 낫느니라.”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다.” 이 말은 『아함경』 등에서 부처님이 매우 강조한 말이다. 불·법·승 삼보도 결국 법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이를 하나로 보는 것을 동체삼보(同體三寶)라 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진리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 예불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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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스님 : 194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강주, 정법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 및 역경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으로서 승가 교육에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처음처럼』,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