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마음 따라] “엘리스, 스님이 기도해 줄게”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11-01-24     혜민 스님

나의 전생 이야기

나는 중국 당나라 말기에 어느 지방 정부의 관료였다. 성공을 향한 패기와 도전 정신이 강했었고, 약간의 무리수를 두더라도 상사로부터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잘 마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남쪽지방으로 도망을 가야만 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나는 이미 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에게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었다. 나는 사람들의 눈 을 피해 돌아다니다 결국 중국 남방지역의 어느 절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를 숨겨주신 그 절 주지스님의 권유로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고 승려가 된다.

글을 아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글을 좀 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은사스님은 늦깎이인 나를 많이 찾으셨다. 그로 인해 나를 향한 사형·사제들의 시샘 또한 컸다. 그것을 빌미로 은사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나서, 나는 그 절을 떠나야만 했다. 후에 숲이 가득한 중국 남부의 어느 강가 근처에 삼하사(森河寺)라는 이름의 작은 절을 짓고 살다가, 쉰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여생을 마치게 된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늘 가슴 한 구석엔 딸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자리해 있었다. 뜻하지 않게 굴곡이 많았던 삶을 통해 느낀 무상(無常)이라는 불가의 진리를 가슴속으로 깊이 새기면서 다음 생을 기약해야 했다.

중국 여대생, 엘리스와의 만남

내가 엘리스를 알게 된 것은 전생에 내 친동생이지 않았을까 싶은 미국계 중국인 친구의 소개 덕분이었다. 2003년 북경에서 박사 연구차 공부를 하게 되면서, 중국어 실력 향상을 위해 ‘랭귀지 파트너(Language Partner)’ 즉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내가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친구를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사람이 엘리스(영어 이름)라는 대학교 3학년 중국인 여학생이었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엘리스는 꿈이 많고 성격도 발랄한 전형적인 중국 신세대 학생이었다. 한편으로 내가 하고 있는 외국 유학생활을 동경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남동생을 많이 걱정하는 효녀이기도 했다.

중국어 공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면서 내가 학교 수업 중에 잘 모르는 표현들을 적어와 물어보면 엘리스가 꼼꼼하게 도와주었고, 내가 영어를 가르쳐줄 차례가 되면 엘리스와 어떤 주제에 관해 프리토킹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살던 북경의 아파트는 대학들이 많은 지역으로 엘리스가 다니는 학교 또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저녁에 근처 배드민턴 연습장이나 카페, 중국 식당 등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 대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저녁식사나 차 값을 내가 지불하려고 하면, 엘리스는 꼭 자기 몫은 자기가 낸다고 하는 탓에 만나는 장소를 되도록이면 저녁에도 불이 환한 대학교 배드민턴 연습장과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장소로 했다.

나는 엘리스를 통해 당시 중국 대학생들의 꿈과 현실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집에서 어렵게 마련하여 붙여주는 넉넉하지 않은 생활비와 여덟 명이 같이 써야 되는 비좁은 대학 기숙사 생활 속에서도, 엘리스는 졸업 후 외국계 회사에 취직을 꿈꾸고 있었고 가능하면 대학원 공부도 더 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북경에 3년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관광명소를 나보다도 더 가보지 못해서, 가끔씩 나와 함께 판자유엔[潘家园] 마켓이나 북경 서쪽 근교에 있는 절 구경을 다니기도 했다. 내 영향 때문인지 점차 엘리스도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끔씩 나를 만나 본인의 중국 남자 친구와의 문제점을 토로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인연, 그리고 애잔한 마음

랭귀지 파트너로서 만나는 것도 엘리스가 졸업을 앞두고 입사 준비를 하면서 점차 그 횟수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졸업 후 엘리스는 보수가 상당히 좋은 어느 북유럽 회사의 영어 통역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 내가 영어를 가르쳐 주면서 행운을 가져다준 덕이라며 첫 월급으로 비싼 음식 대접을 받았다. 그 후 나는 두 해 동안의 북경 유학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완성하면서 엘리스와는 가끔씩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엘리스를 다시 만난 것은 북경 올림픽이 있었던 2008년 초여름이었다. 학회 참석차 잠시 북경에 들러 만난 엘리스의 환경은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엘리스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으며, 남동생이 군대에 입대를 했다가 훈련 중 다쳐서 다시 시골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임시직으로 다녔던 유럽 회사에서도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꿈 많고 생기 넘치는 발랄함이 질곡의 세월로 인해 많이 수그러진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내 앞에서 애써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지난 3년간의 일들은 20대 초에 갑자기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참으로 힘겨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엘리스가 말했다. “스님이 예전에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요번에 다시 스님을 다시 봤으니까 이제부터는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요.”라고. 그 순간 불현듯 내 전생의 딸 모습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몇 번의 서신 교환을 통해 가끔씩 전해들은 소식은, 그 애가 못난 아버지로 인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어야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엘리스,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스님이 기도해 줄게.” 택시를 타고 가라고 손에 쥐어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한사코 거절하고, 엘리스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 위에 올라탔다. 떠나는 버스 안 엘리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애잔한 마음과 과거의 회상들이 눈가에 고인 눈물과 함께 나도 모르게 뒤범벅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님들의 글은 대개 글 안에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독자 분들이 괜찮으시다면, 이 글만큼은 어떤 가르침을 일부러 불어 넣으면서 마무리를 짓고 싶지 않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무수한 인연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그 과정 자체가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가르침이 아닐까 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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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