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생각에 뒷생각을 덧붙이지 않으면

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 / 휴식

2010-12-24     불광출판사

자족보다 값진 승리는 없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엔 눈 내린다. 무어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한가롭게 지낸다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 무문혜개(無門慧開), 『무문관(無門關)』

‘휴식형’ 템플스테이가 인기다. 말 그대로 쉬기 위해 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프로그램도 단출하고 규율도 녹록한 편이다. 고성방가와 노상방뇨를 삼가고 예불과 공양시간 정도만 준수하면, 1박2일 동안 자중휴(山中休)를 즐길 수 있다. 혼자 오는 경우도 많다. 고독한 여행자들은 20~30대 직장인이 다수다. 스님과의 다담(茶談) 시간에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푸념이 주류다.
체험자들의 후기를 보면 의외로 사소한 데서 놀라운 쾌감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계곡에 발을 담근 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자유”,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신기함”, 그리하여 “들리는 모든 것이 평안하고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술회. 그들은 굳이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세상은 굴러간다는 성찰과, 세상이 도와주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한 달간 회사를 쉰다. 월급을 받지 않는, 사실상의 실직이다. 지갑이 비어서 사뭇 걱정이지만 속은 편해서 다행이다. 꼴 보기 싫은 놈들 안 봐서 좋고, 연기(演技)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적어도 집안에서는 느낌대로 움직이고 성질대로 말할 수 있다. 일상을 멋대로 소비해도 누구 하나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아내가 있지만, 그녀는 내 유일한 친구다. 요즘의 근황은 삶의 궁극적 목표였던 무위도식에 근접해 있다. 가끔, 이 자리에서 당장 허물어져버리고 싶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활의 둘레가 점점 쭈그러든다. 익숙하고 만만한 것들만 상대하려 들고, 낯설고 거친 것들과의 교감은 귀찮기만 하다. 뭔가 대단한 걸 성취하거나 남을 이겨먹겠다는 욕심도 차츰 기력을 잃는다. 그리고 그 욕심이 더는 재기할 수 없게끔 언제나 몸조심 마음조심이다. 나태하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애늙은이라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는다. 본래 자족보다 값진 승리는 없으니까.
꽃이든 달이든 바람이든 눈이든 자연은 언제나 아름답다. 나와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일터만 나가면 평상심(平常心)에 자꾸 물이 스미고 균이 꼬인다. 꽃이 피는 옆엔 반드시 적(敵)이 있고 달 밝은 아래엔 항시 싸움이 난다. 이익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동네이니 어쩌면 당연지사다. 진실보다 진영을 고민하고 소통보다 내통에 눈독을 들이게 마련이다. 내가 아닌 것들은 쉴 새 없이 나를 흔든다. 나 역시 순순히 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반사적으로 습하고 냄새나는 생각에 손을 댄다. 한 푼이라도 더 얻어낼 요량에 최대한 똑똑한 척 점잖은 척이다. 그러니 밥벌이도 일종의 ‘쇼(show)’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겨야 하는 게 노동의 본질이다. 본질이 탁하니 중심은 자꾸 흔들린다. 실리만 빼먹자니 노략질과 다를 바 없고, 공익만을 추구하자니 옥살이와 매한가지다. 내안에서 누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기는 한데, 누군지도 누구를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정진(精進)이라기엔 석연치 않고 더구나 억울하다.

의도적 무심(無心)
고목(枯木)은 봄빛과 이별하고 영양은 돌에다 뿔을 걸었네.
- 혜심(慧諶), 『선문염송(禪門拈頌)』

‘심선자(心禪子)가 길을 떠나다’란 제목의 오언절구(五言節句) 한시에서 뽑아낸 구절이다. ‘심선자’란 ‘마음을 닦는 수행자, 혹은 마음의 원리를 깨달은 수행자’ 쯤으로 풀어쓸 수 있겠다. 영양은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린 채 잠을 잔다. 맹수의 습격에 대비해 발자취를 지우기 위한 고육책이다. ‘영양이 뿔을 걸듯’이란 표현은 선가(禪家)의 오래된 비유다.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 선사는 『전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면 대중은 그 의미를 좇겠지만, 내가 영양이 뿔을 걸듯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어디를 더듬겠는가’ 위에 소개한 시는 나뭇가지 대신 돌로 살짝 비틀었다.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진실은 개념과 논리를 벗어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한 언어유희로 보인다. 흔적, 곧 눈에 보이고 말로 읽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본뜻은 그대로다. 이제 비로소 마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데, 행여 인생에 이른바 봄날이 온다고, 바람이라도 날 줄 아느냐, 이런 식이다.
임란(壬亂)의 영웅 서산대사의 본명은 ‘청허휴정’이다. 스님의 육필을 모은 『청허당집』을 열면 숨겨져 있던 시인의 면모가 드러난다. 정갈하면서도 기발한 시어와 함께 주목되는 건 고독과 절세(絶世)에 대한 탐닉이다. “내 마음이 바라는 것, 남들과 함께하긴 어렵다”며 단호히 선을 그었고, “만약 다시 무슨 생각을 하려고 든다면 귀신들의 소굴로 빠져들리라”며 야망을 빙자한 번뇌를 경계했다. “여관과도 같은 이 세상, 번갯불에 몸을 맡긴 격”이란다. 현실의 간섭을 거부하는 몽상의 언어들은 대개가 느리고 가벼우며 무책임하다. 당신이 영위하고 희구하는 삶은 참전(參戰)이란 극단적인 사회참여와 전혀 무관하다. 맑은 가난[淸]과 빈 마음[虛]으로 내내 집에서 쉬며[休] 입 다물고 사는 게[靜] 시적 자아의 정체성이다. 한편으론 전쟁, 억불, 무고에 의한 투옥, 유생들의 능멸 … 어지간히 혼곤하고 고단했던 역사적 자아를 치유하기위한 의도적 무심(無心)이었을 것이다.
외부의 부정적인 자극을 인지하면 온몸에 퍼져있는 교감신경계가 끓어오른다. 자극이 위험할수록 가급적 많은 혈액을 근육에 급파하고, 호흡의 극대화를 위해 폐를 부풀린다. “더 세게 때리거나 더 빨리 달리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태세 구축이다. 저항 아니면 도주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선택이다. 곧 피아(彼我)를 확실히 구분하고 명민한 상황판단을 돕는 교감신경계의 정상적인 작동은 삶의 안보와 직결된다. 그러나 고삐 풀린 교감신경계는 스트레스를 양산하고 신체기능을 교란해 다양한 내과 질병을 야기한다. 이때 휴식과 소화를 담당하는 부교감신경계가 교감신경계를 완화시키면 마음은 평정을 얻고, 인체는 건강을 회복한다. 명상으로 부교감신경계를 단련해일정한 내공을 키운 뒤, 생기와 활력을 북돋우고 기회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교감신경계의 발호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 『붓다 브레인』이 설파하는 ‘행복한 인생’이다. 제정신이 붙어있는 한 죽을 때까지 자극과 놀아줘야 하는데, 놀아주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마음과 샘물의 공통점
지을 때도 헛것이요 받을 때도 헛것이며 무언가 알아차릴 때도 헛것이요 어리석어 모를 때에도 헛것이다. 그릇되게 살고 있음을 알았으면 그 헛것을 약(藥)으로 삼아, 다시 병(病)이란 헛것을 치료하면 될 일이다.
- 대혜종고(大慧宗杲), 『서장(書狀)』

조계종의 정통 수행법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한 대혜종고 선사가 증천유(曾天遊)라는 재가 수행자에게 부친 편지의 일부다. 증천유는 관직이 오늘날의차관급에 해당하는 시랑(侍郞)에 오를 만큼 나름 성공한 사대부였는데, 불가의 깨달음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러 선사들에게 자문을 얻으며 정진하던, 바람직한 벼슬아치였던 셈이다. 하루는 마음공부에 진척이 없자 이를 토로하는 내용의 서신을 대혜 스님에게 보냈다. 일언이폐지하면 “성실한 직장인이자 가장으로 살려고 노력하느라 수행에 전력투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이렇게 늙어버렸다”는 하소연이다. 스님은 답장에서 우선 “세속에 머물면서 그런 번뇌를 피하기가 쉽겠느냐”며 “당신의 죄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아울러 “그런 고민들은 전부 헛것(幻)”이라며 “앞생각에 뒷생각을 덧붙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헛것이듯, 이렇게 살지 않는 것,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 역시 헛것이니까.
스무 살 즈음에 읽은 『도덕경(道德經)』은 지금껏 유효한 처세론을 알선해주었다. ‘세상은 스스로 움직일 뿐[무위자연, 無爲自然] 내가 어떻게 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노자(老子)의 속삭임은 든든한 위안이 됐다. 아울러 ‘이러한 세상의 흐름을 알고 조응할 때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조언도 여전히 귀에 울린다. 내가 쉬어야 나 아닌 것들도 쉬는 법인데, 내가 맞장구를 쳐주니까 녀석들이 더욱 기세등등해지는 것이다. 결국 내가 나의길만 묵묵히 가는 게 세상에 대한 선도(善導)요 삶에 대한 예의가 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에 대한 비난에 덜 슬퍼지고 내가 겪는 고초에 덜 아플 수 있었다.* 이후 선어록을 훑으면서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달마의 무심(無心)은 삶에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갈증과 오판은 필연적이란 것을 일깨워줬다. 선사들의 해체와 파괴는 보면 볼수록 기막히다. 그중의 압권은? 고통도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내일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눈이 내릴 것이다. 만물이 일손을 놓고 칩거에 들어가는 계절이다. 가을바람에 나무의 정체가 뽀록난다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을 실감한다. 현장검증을 위해 다들 열심히 죽어준다. 살림을 지키고 낙오를 면하려 오랜 시간 세상을 흉내 내고 여론을 따르는 시늉을 해왔다. 두문불출하며 쉬니까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입 있는 것들이 연루된 기억은 팔할이 불쾌하거나 치졸하다. 눈에서 멀어지니 미움도 멀어진다. 물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 날은 기어이 온다.교감신경계도 다시 광분할 것이다. ‘나이고 싶지 않은 나’,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것’들과의 만남이 폭주할 것이다. 그러나 앞생각에 뒷생각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그나마 살 만해질 것임을 믿는다. 마음은 샘물과 같다. 반드시 누가 와서 돌을 던지게 되어 있다. 돌을 줍겠다고 손을 넣어봐야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기다리며 견디고 견디면서 기다린다. 끝내 잠잠해지는 물결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인터넷에서 펜션을 뒤지고 여행사를 탐문하는 수고를 던다. 뒤가 무겁지 않은 지금 여기가, 해변이고 숲길이다.

어설프게 눈치 보다가 이것들한테 또 당했다. 쉰다는 것도 헛것임을 알게 되니, 이제 진짜 쉴 수 있겠다.


(* 최소한 이렇게 자위할 수 있는 심리적 조건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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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불교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길 위의 절』(2009 문화체육관광부우수교양도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