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어여쁜 생명의 ‘빛’

내 마음의 법구

2010-11-30     김선우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이 땅에 살아온 우리네어머니들이 대개 그렇듯, 내 어머니도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여러 생을 거듭한 오랜 인연이 만들어낸 약속임을 알고 계신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인연 말이다. 하여 나를 얻기 위해 어머니가 백두대간의 골짝골짝 숨어있는 절집들에서 기도드린 이야기를 할 때면, 어머니의 기도가 이어지던 그 골짝골짝의 모든 생명붙이들이 나의 탄생을 어머니와 함께 빌어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사는 일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 내가 잉태되고 태어날 무렵을 상상해본다. 그러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새로 생긴다. 한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많은 생명이 마음을 모아주었으리라는 생각이 오롯이 들고, 내 생명이 다른 생명들의 기도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뭇 생명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수년 전 여름 한철을 합천 해인사에서 난 적이 있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절실한 불심(佛心)이 문자언어로 보존되는 그곳은 문자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귀한 공간인데, 그 특별한 곳에서 첫 장편 작업을 할 수 있어서 무한히 감사한 날들이었다. 더불어 가끔씩 스님들께 얻어듣는 지혜의 말씀들이 청량한 죽비소리처럼 나를 깨워주곤 했다.

어느 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해인사 경내를 거닐던 참이었다. 나지막한 담장의 오목기와에 거미줄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큰스님이 그 담장의 거미줄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그때 거미줄로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새로 걸려든 먹잇감 쪽으로 거미가 슬슬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미물들의 먹고 먹히는 생존사슬의 장인 셈이니 굳이 관여할 바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스님이 손을 내밀어 그 조그만 날벌레를 거미줄에서 살며시 거두어 담장 저편으로 보냈다. 갑자기 먹잇감이 사라져버린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거미가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작은 거미가 나는 신경이 쓰였다. “얘는 배고파서 어쩌나요?” 장난스레 건넨 한마디에 “그러게나 말일세.” 스님이 머쓱하게 대답하셨다. 그리고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진 말씀. “얘를 살리면 거미가 투덜댈 테지.

하지만 약자를 보면 즉각 구하는 것. 건너편에서 또 걸리면 또 구하는 것.”그때 마음이 쿵, 울리며 쏴 하고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스몄다. 그 사소한 풍경 앞에서 세상만사가 먹고 먹히게 되어있다는 초연함을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거미줄에 걸린 미미한 생명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 버둥거림에 즉각 답하는 스님의 잿빛 승복 자락이 아름다웠다.

중생의 아픔에 온 감각으로 즉각 반응할 것. 초연한 자세로 고통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고통의 구제를 위해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를 물을 것. 그 순간, ‘대자대비’라고 우리가 늘 중얼거리는 한 말씀이 생생한 활기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큰 종소리는 가장 작은 것들에서 들려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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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가 있으며,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외에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