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7 개봉 상국사와 숭산의 소림사

불국토 순례기 ; 중국사찰기행. 마지막회 개봉(開封)의 상국사(相國寺)와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

2007-06-11     관리자

1993년 1월 8일, 하남성 정주(鄭州)에서 우리의 원로 서예가 '김응현 서법전'에 동참을 겸해 복건성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찾고자, 5일 아시아나기로 천진에 내렸다. 북경에서 하룻밤 쉬고, 중국민항으로 정주로 날려는데 호사다마라고 심한 안개로 기차를 타야 했다. 국내 단거리용은 프로펠러기라 유도장치가 없어 안개나 눈이 오면 비행을 못해서였다. 탑승객으로 아우성인 공항 안내에선 대무(大霧)만 걷히면 곧 뜬다는 바람에 야금야금 기다린 것이 무려 9시간, 결국 탑승을 포기하고 기차로 가서 8일 개회식에 맞춰야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부랴사랴 북경역으로 달려 승객으로 아수라장 같은 광장 길가에서 덜덜 떨면서 차표를 구해오는 여행사 직원을 기다렸다가 다행히 특쾌연차(特快軟車:특급침대차)표를 사기는 했는데, 상하단 2매와 상중하단 3매였지만, 일단 타고 보자는 엉뚱으로 홍모(紅帽)에게 부탁해서 짐을 싣고 개찰도 하기 전에 정주행 지정석에 짐을 얹어놓고 차장인 복무원에게 교섭해서 아예 한칸(4일 좌석)을 차지해서 일행이 한자리에 앉아 사뭇 무용담을 나누며 독한 두강주(枓康酒)를 마시면서 이튿날 6시 20분 정주역에 내렸었다.

   정주는 북위 35도여서 우리나라 부산처럼 진눈깨비가 내렸다. 마중을 나온 하남서법협회 이강(李强) 씨가 첫눈이라 서설(瑞雪)이라고 길조(吉兆)라면서 중국인 특유대로 주먹을 치키며 엄지를 올린다. 나도 좋아 문득 왕희지(王義之)의 명품 [쾌설청첩(快雪晴帖)]을 연상하며 혼자 웃었다. 우리 일행은 일단 하남 국제호텔에 들어 우선 샤워부터 하고 중국식 아침인 죽을 들었다. 숙주나물 볶음이 간이 맞았다.

   9시 하남서화예술원 2층 홀에서의 '김응현 서법전'의 개회식은 눈비가 오건만 성황을 이루었다. 하남서화협회 진천연(陳天然) 회장의 "이 서법전이 빌미가 되어 우리 하남서법계에 일신이 되길 바란다"는 기념사처럼 여초(如初)에의 예우 또한 극진해서 그 필력에는 매양 웃도는 중화의 자존도 소용없음을 실감했다. 동참한 우리 일행도 우쭐했었다.

 본래 일정은 개식을 마치고 연회를 끝내면 곧장 낙양(洛陽)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안개와 눈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자동차는 숭산(嵩山)의 고갯길에 눈이 깔려 불통이고, 기차는 만차(慢車:완행)라 붐빈다는 바람에 자동차 길이 뚫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료한 나머지 자유경제로 바뀐 백화점을 둘러보고 하남박물관을 찾았다. 그런데 겨울이라 관람객이 없어 휴관이란다. 실은 안양(安陽) 출토의 고기(古器)와 옥기(玉器), 그리고 갑골(甲骨)을 살피려 했는데, 겨우 간청해서 한나라 토기만 보고 돌아왔다.

   1월 9일, 역시 자욱한 안개로 10m앞도 희미한 날씨였다. 가끔 눈도 날린다. 일행은 동쪽의 개봉(開封)으로 가서 오대(五代)이래 북송(北宋)에 이르기까지 수도였던 변경(변京)관광을 제의해왔다. 실은 불감청이 고소원이었다. 그 길은 평야에다 자동차로 90분이 걸리는 고도(古都)로 서화의 수준이 높고 하남박물관의 고비(古碑)와 묘지석, 그리고 웅장한 상국사(相國寺)의 유물이 으뜸이란다.

   워낙 상국사는 천보(天保) 6년 (555) 창건한 옛절이다. 스스로 천하웅(天下雄)을 과시하는 대상국사였는데, 원명인 건국사(健國寺)를 당 예종이 연화(延和) 원년(712) 상국사로 개명했었다. 명나라 말년 대홍수로 침수되어 절이 무너져 청나라 건륭 31년(1766) 중견했단다. 특히 문화혁명 때는 시불(侍佛)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작년말까지 인민정부에서 사용하다가 저번에 비로소 돌려 받은 절이었다. 따라서 보살상은 아예 상반신을 떼어버리고 다만 좌대만 허전한 판이었지만 다행히 천왕전과 나한당과 대웅보전 건물은 그대로였다. 물론 단청은 퇴락해서 고색이 창연했다.

   특히 나한당의 천수천안관음상(千手千顔觀音像)은 실로 놀라운 목조로서 얼른 보기에 껄끄럽기 마련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거룩한 중국의 중요문화재였다. 4면의 관음상에 천의 손바닥(1면에 250)에 하나같이 눈동자가 영롱해서 더욱 경외로웠다. 실은 청초(淸初)에 백과수(白果樹)로 조소한 5.40m의 대작으로 전신에 금을 입혔었는데 거의 바랬고, 소쇄도 안됐었다.

   그러나 그 교묘한 꾸밈새와 그 정치(精緻)한 공교미는 자못 세계적이었다. 일본 교토 광륭사(廣隆寺)의 천수관음상에 비겨도, 사천성 신도(新都) 보광사의 나한당의 천수관음상에 비겨도 단연 윗길의 걸작이었다. 다만 사진은 절대 못찍게 해서 퍽 아쉬웠다.

   이어 팔각전(八角殿)의 두루한 5백나한상이다. 규모는 보광사 나한당만큼은 못돼도 모습과 복식이 각양각색인데, 특히 아랍계 나한의 텁수룩한 수염의 우악스런 인상은 아주 돋보이었다. 다시 웅장한 대웅전에 들어가 불전에 3배를 올리고 나와 개봉박물관을 찾았다. 그런데 달포 전에 모진 도난사건이 있어 문을 닫고 군인이 집총을 하고 있었는데, 정부공보국의 배려로 국보급의 묘지석(墓誌石)과 작은비는 떼어서 들어갔다 한다.

   북위(北魏)와 한비(漢碑) 그리고 당비(唐碑)를 그것도 서예가 여초(如初)의 설명까지 들어 안복(眼福)을 만끽하고, 진눈깨비를 맞으며 시장경제로 뒤바뀐 고옥 그대로의 고서화점인 경고재(京古齋)를 둘러보고 유명한 8각 13층 철탑(鐵塔:실은 갈색의 유리와전)은 눈으로 해서 오르지 못하고 정주로 돌아왔다.

   1월 11일, 날씨가 포근해서 숭산 고갯길의 눈과 얼음이 녹아 자동차 통행이 무난하다는 바람에 마이크로버스로 숭산 소림사(少林寺)로 떠났다. 실은 예약된 차가 2시간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예정한 공의(鞏義)의 두보의 생탄요(生誕窯)와 묘소인 능원(陵園)의 참방은 중지하고, 곧장 밀현(密縣)을 거쳐 등봉현(登封縣)에 도착하니, 멀리 오악(五岳)의 하나인 숭산이 희미하다. 실은 지난 92년 5월에도 선종(禪宗)의 원조인 달마(達摩)대사의 소림사는 참배했었다. 그런데 무술인 소린권법(少林拳法)을 관람하느라 헛된 시간만 보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도교(道敎)의 묘로는 가장 빠른 중악뵤(中岳廟)부터 찾았다. 일찍이는 숭양사(崇陽寺)였는데 수(隨)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도관(道觀)으로 바뀌었다. 연도에는 천년 묵은 숭산백(崇山柏)이 즐비한데 명패에는 한백(漢柏)이라 붙었다. 그리고 엄전한 철인상(鐵人像)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섰고, 바로 그옆에는 북위(北魏)의 [중악중천숭성제비(中岳中天崇聖帝碑)]가 섰다 전면은 해묵어 혜식어서 몇 자밖에 읽을 수가 없는데 뒤의 음기(陰記)는 그런 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이 고비의 탁본을 어제 구했지만 직접 더듬으니 감회가 새롭다며, 여기 중간에 구멍이 뚫린 것은 위비(魏碑)의 특징 이란다. 바로 옆에는 복원해서 새로 세운비가 섰다. 그리고 그 위에는 명필 동기창(董其昌)의 서단비(書丹碑: 朱墨으로 썼는데 퇴색)도 섰고, 또 [태종문황제어서비(太宗文皇帝御書碑)]가 섰는데, 그 중간에는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수결이 새겨 있어 어찌나 탁본을 했는지 반들반들 달았다. 그리고 위에 올라 거대한 [대당숭양관기 성덕감응송(大唐嵩陽觀記 聖德感應頌)]비도 읽었다. 그 위의 중악대전(中岳大殿)은 누런 기와를 이어 중후함이 더했다. 사실 중악묘는 이세민이 낙양을 공략할 무렵 소림사의 승려가 나서서 전공을 세웠음을 중국불교사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다.

   한편 송의 성리학의 원조인 정호(程顥)와 정이(程이)가 강학한 숭양서원(嵩陽書院)에 들렀는데, 높은 숭산길을 넘으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하니 소림사를 대충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사(중국에서는 스후[師傳]로 스승이라 부름)의 채근에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소림사 정문으로 들어가 신스러운 미륵불상에 삼배를 올리고, 이어 육조전(六祖殿)에 들러 달마 대사가 금릉(金陵 : 南京)에서 양(梁) 무제(武帝)와 뜻이 어긋나 갈대를 꺾어 타고 강을 건너 소림사에 이르렀다는 사단을 그린 달마도강상비도 보고 이조(二祖) 혜가(慧可)와의 선문답인 "마음이 괴롭다니 마음을 이리 가져요라"는 사연을 상기하면서 사리탑이 임립한 탑림(塔林)으로 향하였다. 그러니까 낮추어 일컬으면 묘탑(墓塔)이요, 부도숲이다. 규모는 크고 작기는 해도 모두 와전(瓦傳)으로 현재 당. 송. 금. 원. 명. 청에 이르는 230여좌가 촘촘히 섰다. 대개 3층 내지 7층으로 쌓여 있다.

이상으로 내가 중국에서 참배한 사찰 가운데서 엄지로 꼽히는 명찰을 간골라서 그 참례기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워낙 바쁜 걸음이어서 이른바 달리는 말에 앉아 꽃을 바라보는 주마관화(走馬觀花)임을 스스로 꾸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