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사유의 ‘그윽한 곳집’ 짓기

2010-10-29     정진규

젊은 날 읽은 『법구경(法句經)』의 대목들이 떠오른다.

『법구경』의 첫머리 「쌍서품(雙敘品)」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대로 옮기어 본다.

부처님이 길에 떨어져 있는 묵은 종이를 보시고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시어,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으셨다. 비구는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여쭈었다. 부처님은 다시 나아가시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새끼를 보시고 그것을 줍게 하시어, 그것은 어떤 새끼냐고 물으셨다. 제자는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것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여쭈었다.

이를 두고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 미루어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곧바로 이어졌을 ‘비린내가 나는 새끼가 되지 말고, 향내 나는 종이가 되라’는 훈교는 젊은 날의 나에게는 그저 답답하고 재미가 없었다.

향과 종이, 새끼와 생선, 그 이질적인 사물들이 필요에 의해 한 몸으로 여합부절(如合符節, 사물이 꼭 들어맞음)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사유의 건방기는 다른 곳을 보려고 했다. ‘모든 사물들이 꼭 필요에 의해서만 그렇게 여합부절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여합부절은 없는 것일까.’ 그런 사유의 ‘그윽한 곳집’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나의 젊은 날에는 훨씬 흥미로웠다.

이러한 나의 그윽한 곳집 짓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시(詩) 같은 것을 끼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사물들(대상)과 ‘하나 되기’를 하고 있었다. 사물들과 사물들이 서로 교응(交應)·교감(交感)하고 있음을, 그것들의 안과 밖을 하나로 드나드는 비의(秘儀, 비밀스럽게 행하는 의식)의 통로가 있음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로 드나들고 있는 나를 자연스레 언어로 옮겨 놓고 있었다. 수사와 구조는 거의 동시적으로 따라와 주었다.

예까지 이르면서 내가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불가의 불이(不二)도 그래서 짐작이 갔다. 횡설수설(橫說竪說)인가 싶으나 ‘곡식들이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자란다’는 말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회통(會通), 그 자연의 질서를 나도 터득하고 있었다.

‘눈에 밟힌다’는 어머니들의 말. 이 말은 내 ‘몸 시론(詩論)’을 정립시켜준 하나의 근간인데, 여기에 안과 밖의, 마음과 몸의 일체화, 그 여합부절의 실체가 있었다. 얼마나 집 떠난 자식이 그리우면, 그 그리움이 무게를 지닌 실체로 눈에 밟히겠는가. 불가시성의 마음이 가시성의 몸으로 태어나고 있다. 안과 밖의 경계가 무봉(無縫)으로 지워지고 없다.

진정한 법구(法句)는 사유의 ‘그윽한 곳집’을 짓게 한다. 그 그윽한 곳집에서 진정한 여합부절의 몸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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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올해 만해대상 문학부문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현대시학작품상, 월탄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 주간을 맡고 있다. 저서로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 『몸詩』, 『알詩』, 『공기는 내 사랑』 등이 있으며, 시론집 『한국현대시산고』, 『질문과 과녁』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