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지본처(還至本處)를 구현하는 우리 시대의 제자리찾기 운동

만남, 인터뷰 /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2010-10-29     불광출판사


혜문 스님(37세)을 만나러 남양주 봉선사로 가던 날은 공교롭게도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한 날이다. 거리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가로수가 뽑히고 간판이 떨어져 나갔다. 도로에는 신호등이 부러진 곳도 있었다. 봉선사의 5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커다란 가지가 찢겨져나가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을 막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이래저래 어수선한 마음으로 혜문 스님의 처소에 들었는데, 분위기가 급반전된다.
혜문 스님은 말이 참 빠르고 유쾌하면서도 열정적이다. 별도의 질문이 없어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온다. 이렇게 쉬운 인터뷰도 있나 싶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앞선다. 스님이 풀어놓은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우리는 무엇을 왜 잃어버렸나
지난 8월 10일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담화문을 통해 조선왕실의궤 반환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의궤 반환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혜문 스님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혜성처럼 떠올랐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것처럼 비쳐지지만, 그의 과거를 들춰보면 가히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의 문화재반환운동 시작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사스님(철안 스님)이 경기 북부의 조계종 사찰을 관리하는 교구본사인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봉선사 산하 27개 전통사찰의 문화재현황조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문화재 현황 파악을 맡겨주셨는데, 일제 강점기와 6.25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수행자가 잃어버린 참마음을 찾아가듯이, 약탈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나하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이뤄낸 대표적인 성과들을 살펴보면, 최근 조선왕조의궤반환 약속을 받아낸 것을 비롯하여 삼성 리움박물관 소장 ‘현등사 사리구’반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반환,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은제도 금은제라마탑형 사리구’ 반환 추진 등이다.
처음 문화재반환운동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조소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밀어붙였고 결국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신념의 밑바탕에는 2004년 일본 교토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한 권의 책 『청구사초』가 있다.
“도쿄대 교수 쓰에마쓰(末松)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는 제 인생을 바꾼 책으로서, 제 소장서 1호입니다. 이 책에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도쿄대에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때 어떤 종교적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표지를 펼치면 ‘저자 걸정(著者 乞正)’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제 마음대로 오역을 하게 됩니다. ‘저자가 교정을 청한다’ 즉 오탈자를 바로잡아달라는 뜻인데, 제게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바로잡아 달라는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때 반짝했던 상념이 제 인생의 큰 방향을 결정해준 순간입니다.”
이후 1년 반 동안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반환 준비를 해오다, 2005년 12월 30일 국회에서 ‘친일파 재산환수법’이 통과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봉선사 관할 내원암 토지 20여만㎡(4만8000평)가 친일파 후손에 의해 반환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봉선사는 ‘친일파의 재산권 보호는 위헌이란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을 법원에 청구하며 맞섰다. 그리고 3,0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한 ‘조계사 촛불집회’를 개최하는 등 사회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재산환수법’을 이끌어내며 이후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찾기에 제동을 거는 역사적인 큰 틀을 만들었다.
내원암 사건이 종결되면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는 운동체로 발전시키자는 데 뜻을 모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월정사 측에 동참 협조를 구하고 5개월간 일본을 8차례 방문하며 반환 결정을 받아냈다.
“조선왕조실록 반환은 미완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했기 때문입니다. 실록은 되찾았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거죠. 약탈자를 선의의 기증자로 만들면서 의미가 굉장히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8월 사죄 표현과 함께 조선왕실의궤반환을 약속한 일본 총리 담화를 통해, 앞으로 식민지시대의 청산과 민족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획기적인 발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왜곡된 정신을 바로 잡아가는 제자리찾기 운동
그렇다면 정부를 비롯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문화재반환운동이 왜 그를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일까? 그는 문화재의 속성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가 문화재에 대해 언급할 때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이라고들 하지만, 핵심은 돈의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이른바 문화재를 보물이라고 일컫듯이, 누구나 보는 순간 갖고 싶어서 소유의 욕망을 느낍니다. 소유의 문제에 얽매이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되며 상향식 이동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문화재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뺏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화재를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절대 문화재반환운동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화재 제자리찾기’라는 관점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문화재가 제대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술적인 의미가 분명히 부여될 수 있는 곳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끝에는 힘 있는 자가 남의 것을 빼앗았으면 빼앗긴 자에게 다시 돌려주는 양심회복운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자리찾기는 불교적 표현을 빌면 환지본처(還至本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 정토, 불성, 진리 등 불교적 가치가 모두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리찾기는 21세기의 불교운동으로서, 불교의 사회화이자 불교사상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오는 활동과 더불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위구르 지역의 문화재를 돌려주자는 운동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왜 우리가 갖고 있는 걸 남에게 주느냐’는 반대 의견에 많이 부딪친다고 한다. 이러한 허위의식을 깨지 못하면 우리의 문화재 역시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엔 어떤 문화재를 찾아와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왜 빼앗긴 문화재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재반환운동은 큰 범주에서 제자리찾기 운동의 일관된 맥락 속에 있습니다. 제자리찾기 운동은 사상운동입니다. 그 중심은 역사, 문화, 인권 문제 등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정신을 바로 잡아가는 데 있습니다. 가령 아산 현충사의 정원이 일본식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순신 장군이 살던 16세기 정원으로 조성해야 하는데,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불교는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리찾기 운동은 참마음의 제자리찾기, 양심의 제자리찾기로서 또 하나의 불교 수행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제자리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재반환운동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나갔다. 올해만 해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표본으로 보관되어있는 기녀 명월이 생식기 파기와 중고등 음악교과서에 ‘숭어’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 슈베르트 가곡 ‘송어’의 교과서 개정을 이끌어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여성의 생식기가 도려져 80여 년간 보관되어졌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의 마성(魔性)에 경각심을 일으키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송어’의 교과서 개정은 제가 한 일 중 가장 기뻤던 일입니다. 왜곡된 교과서의 거짓된 내용을 진실인양 가르쳤던 과거를 바로잡고, 교과서의 내용까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종교적 성물(聖物)과의 인연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고, 20대 중반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게 출가 인연을 물었다.
“출가 이전과 출가 이후의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과거 이야기는 잘 안 하는 편입니다. 출가 당시에는 가슴에 품은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두 인연의 소치인 것 같아요.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지공 스님과 나옹 스님의 사리를 직접 보며, 종교적 성물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사리를 찾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나를 출가시켰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20대의 저에게 말을 걸어서 승려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2002년 선방에서 수행 중 상기병을 얻었다. 내부의 에너지가 폭발해 고막이 열에 녹아버린 것이다. 그때 광인처럼 남이 못 알아듣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봉선사에서 쫓겨나 회암사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회엄사를 창건하고 고려불교에 새바람을 일으킨 지공 스님, 그리고 그 법맥을 이은 나옹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보스턴 미술관 사리구를 찾아오는 일은 제게 부여된 종교적 소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상기병, 회암사, 지공 스님과 나옹 스님으로 이어진 인연의 소치가 저를 보스턴 미술관까지 이끌고 현재 제자리찾기 운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확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게 됩니다. 제 사상과 신념을 세상에 펴는 일이므로 지금까지 즐겁게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현재 ‘명월이 생식기 파기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여성인권 영화제 출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연극과 뮤지컬로 제작하기 위한 기획을 하고 있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인연이 이어져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줄지 자못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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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 스님ː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1998년 봉선사에서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5년 삼성 리움박물관을 상대로 현등사 사리구를 반환받았으며, ‘친일파 재산환수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2006년부터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간사,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을 맡아오며,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 환수를 비롯해 기생 명월이 생식기 파기, 음악교과서의 슈베르트 가곡 ‘숭어’ 오류 개정 등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