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향한 오류의 나날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부처님의 참모습

2010-10-29     불광출판사



【스승을 찾아 나서다】
붓다가 다른 성인들과 변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붓다에게 많은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왕궁시절 태자로서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붓다는 출가 후 가장 먼저 스승을 찾아 나선다.
일반적으로 성인으로 추앙되는 인물들은 스승 없이 자득(自得)한 것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붓다는 많은 스승들을 통해서 해당 분야의 축적된 전문지식과 당시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을 손쉽게 습득해 나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종교든 철학이든 간에 새로 창도된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면서 전파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있어서 스승이 있었다는 것은 보다 넓은 보편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실제로 붓다의 경우 당대에 크게 성공하는 거의 유일한 성인이다. 이는 붓다가 현실주의자라는 점을 반영하는 동시에, 스승을 통해서 시대적인 요청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즉, 붓다는 당대 최고 스승들을 통해서 지식과 수행을 집대성하고, 이를 초월하는 최상의 가치를 발견하신 분인 것이다.

【고행주의자, 박가바】
붓다가 최초로 찾은 스승은 고행주의자로 명성을 떨치던 박가바였다. 예나 지금이나, 고행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기 마련이다. 더욱이 붓다의 경우, 왕궁의 호사 속에서 고뇌를 통해 출가했으므로 그 반대되는 고행에 끌렸을 개연성이 높다.
플라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하였다. 육체와 영혼을 나누는 이원론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구속하여 장애하는 것은 육체라는 판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출구 없는 새장에 갇힌 새를 생각해 보라. 이때 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새장을 부수어야만 한다. 육체적 고행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육체를 심하게 혹사하면 정신은 보다 높은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는 논리다.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 같은 부호들이 기부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미 더할 수 없이 충분히 가졌기 때문이다. 진정한 버림은 가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왕궁 호사는 붓다가 극심한 고행에 전념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 된다. 이로 인해 붓다는 박가바의 제자로 있은 후 얼마 뒤에 스승과 대등한 단계의 고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행복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는 그 사람의 발전을 좌우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붓다의 진솔함은, 박가바를 찾아가 그가 가르쳐 준 최상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이때 박가바는 자신도 그와 같은 상태일 뿐이니, 그 정도에서 함께 교단을 이끌자는 제의를 한다. 박가바는 깨달음보다 안정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다는 왕궁이라는 안정을 버리고 깨달음을 위해서 출가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박가바와 함께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중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애벌레들은 하늘에 오르려는 무모한 노력을 하다가 결국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애벌레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고 죽어간다. 이는 성공한 인간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이다. 젊은 시절 개혁을 주장하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또 다른 보수 역할에 충실한 것은 인간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붓다는 틀을 깨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박가바 밑에서 경주한 노력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박가바 교단이라는 안정구조를 버린 채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떠나게 된다.

【명상주의자, 아라라 카라마】
고행에 회의를 느낀 붓다는 이번에는 명상주의자 아라라 카라마를 찾아간다. 아라라 카라마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는 높은 명상상태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붓다는 이 인물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후일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당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할 인물로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아라라 카라마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라라 카라마는 녹야원에서 최초의 제자가 되는 5비구와 연관된 측면도 있다. 전적에는 5비구가 아라라 카라마의 교단에 있던 인물들로, 당시 붓다의 수행에 감화되어 붓다가 아라라 카라마와 결별할 때 붓다를 따라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5비구와 관련해서는 석가족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10대 제자 중 한 분으로 석가족인 부루나가 5비구 중 한 명인 교진여의 누이가 낳은 아들이라는 점, 또 붓다의 사촌 동생인 아난 역시 5비구 중 한 명인 십력가섭의 제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석가족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5비구의 출가와 관련해서는, 붓다가 출가한 뒤 이를 되돌릴 수 없게 된 정반왕이 석가족 귀족 중 우수한 이들을 출가시켜 태자를 보필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5비구는 처음부터 붓다를 따르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5비구가 아라라 카라마 교단의 인물이라는 기록이 전하는 것은, 붓다와 아라라 카라마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상징적인 측면이 아닌가 한다.
명상은 붓다를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자라도 명상상태로 살 수는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 명상에는 반드시 입정(入定)과 출정(出定)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후일 붓다에 의해 중도주의로 극복되며, 중국불교에서는 마조의 홍주종에 의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전체작용(全體作用)의 행동주의로 완성된다.
명상을 통한 행복이 완전하지 못함은 붓다가 아라라 카라마와 결별하는 이유가 된다. 붓다는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선다.

【인도 최고의 명상가, 웃다카 라마풋타】
붓다는 아라라 카라마의 방법에 한계를 느꼈지만, 그것은 더 깊은 명상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당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명상가인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간다.
당시 웃다카 라마풋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무색계의 가장 높은 명상 단계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붓다는 명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게 된다.
이때 붓다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한다. 웃다카 라마풋타는 당시 전 인도의 최고 스승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스승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결국 붓다가 스스로 해법을 도출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서기와 6년 고행】
붓다는 웃다카 라마풋타 교단에서 배운 명상을 끝으로, 명상이 자신의 목적인 완전한 깨달음과 이를 통한 행복에 도달하는 법이 아니라는 점을 완전히 자각한 듯하다. 붓다에게 명상은 하나의 방편은 될지언정 궁극적인 결과도출에는 올바름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붓다는 다시금 고행으로 나아간다. 당시 수행은 고행과 명상 두 가지로 대변된다. 그중 명상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으니, 붓다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붓다는 박가바 교단에서 고행한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로 인해 이후 극단적인 고행을 6년 동안이나 지속하는 초인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훗날 붓다는 스스로를 회상하며,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나와 같이 극심한 고행을 한 이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너무 과도한 고행으로 다른 사람들이 붓다가 죽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할 정도이다.
당시 최고의 고행은 식사량을 조절하는 단식이었다. 단식은 고통이 둔감하는 폭이 가장 적기 때문에 고행 중의 고행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붓다 역시 단식을 주로 하였다. 이로 인해 온몸의 털은 다 빠지고, 머리에는 부종이 생겼으며, 배를 만지면 등이 만져지는 극도의 영양 결핍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붓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결국 안 된다는 확신만을 얻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붓다는 더 이상의 대안이 없는 가운데 고행마저도 내던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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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스님ː철학박사(율장)및 문학박사(불교건축). 동국대 철학과 및 불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및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고려대 철학과 박사 수료하였다. 약 50여 편의 논저서가 있으며, 현재 월정사 교무국장으로서 동국대, 울산대, 성균관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