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는 오진암을 바라보면

선어유희(禪語遊戱)

2010-10-29     불광출판사


인사동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보면 일부러 가려놓은 듯한 기와지붕과 높다란 담장을 만나게 된다. 고개를 들면 한문으로 쓰인 작은 크기의 ‘오진암(梧珍庵)’이란 글씨가 큰 문패처럼 달려있다. 50여 년 전에 주인장이 고급 한정식집을 열면서 마당에 큰 오동나무(梧)가 보물(珍)처럼 우뚝한지라 그 이미지를 빌려와 상호로 삼았다고 한다. 인근에 비슷한 규모의 요정들은 그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각(閣)’이나 ‘관(館)’을 사용하는 데 비해 이 집은 유독 암(庵)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 독특했다. 그 개성이 드러나는 이름 때문에 ‘식당으로 화현한 암자’인 것 같아 지나갈 때마다 대문에 곁눈질을 하곤 했다.

오진(梧珍)과 오진
(悟眞)
오진암은 서울시 등록 1호 식당으로서 그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하지만 최근에 주인이 바뀌면서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헐리게 되었다. 그 소식이 장안에 퍼지면서 화제가 되었고 문화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700여 평의 공간에 열 채는 족히 됨직한 한옥이 이어져 있는데, 얼마 전 철거가 시작되면서 기와지붕이 뜯겨져 황토빛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영상은 뒤편 정원의 묵은 오동나무를 포함한 몇 그루의 푸른 나무와 그 빛깔이 대비되면서 더욱 처연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또 다른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여 뜻있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이전해 간 강원도 홍천의 ‘민요연구원’ 57평의 한옥은 오진암 별채로 알려져 있다. 경기민요의 대가인 안비취 선생이 오진암 시절 그 건물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또 인간문화재 지정과 함께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라고 했다. 100여 년 전에 이 집에 거주했다고 전하는 이병직은 조선말의 화가인 동시에 고미술수집가였다. 그는 당시 고서점에 나온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75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오진암은 당시 6만원에 팔았다고 후손 도혜 스님은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오진(梧珍)을 본래의 의미인 암자(庵子)와 제대로 어우러지게 쓰려면 ‘오진(悟眞)’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국에는 소림사와 쌍벽을 이루는 호북성 무당산(옛날 태화산) 무당파의 36암당(庵堂) 가운데 오진암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전라도 불갑사에도 오진암 터가 전해져 온다. 황해도 구월산의 월정사에는 오진암, 달마암, 남암, 묘각암 등의 암자가 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무대로도 등장하는 곳이다. 소설 제9권에는 월정사 주지 풍혈 스님 이름도 나오고 달마암의 김기, 옥여 그리고 오진암의 여환도 등장하고 있다.

오진암(悟眞庵)과 오진(悟眞)
스님
강릉 보현사의 오진(悟眞) 비석은 영동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금석문이다. 구산선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 국사의 제자인 낭원(朗圓) 대사의 행적을 기록했다. 그는 경주사람인데 후학들이 그 비석 이름을 ‘오진’으로 명명해 주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수행생활을 할 때 당시 진관 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진관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지금은 비구니 진관 노장님이 주석하고 있다. 절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오진암에도 오진 스님이 머물러야 어울릴 것 같다.
신라의 오진(悟眞) 스님 이야기는 『삼국유사』 「의해」편에 나온다. 하지만 머문 곳은 오진암이 아니었다.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의상 대사의 십대제자 중 오진(悟眞)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안동 학가산) 골암사(骨巖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浮石室]에 불을 켰다.”
안동에서 영주까지 팔을 펴서 닿게 했다니 그 신통력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도오(道吾) 선사의 법명도 오진(悟眞)이다. 인품이 고고하고 강직하면서도 지견을 두루 갖추었는지라 총림에서 그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어요(語要)』 1권을 남겼다. 당시 자명초원(986~1040) 선사는 양기(楊岐, 992~1049)와 오진을 가장 훌륭한 대덕이라고 평가했다. 『임간록(林間錄)』 하권에 이런 선문답이 전해온다.

오진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부처입니까?”
“동정호에는 뚜껑이 없다(洞庭無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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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ː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재정국장을 거쳐, 현재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써왔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