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효심을 버리라’ 시던 운허(耘虛)스님

나의길 나의스승

2007-06-11     관리자

   세상에서 알기를 월운(月雲)이는 운허(耘虛) 큰스님을 오래 따라 모셨으니, 무어 들은 것이 좀 있지 않을까?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이런 제목을 주어 글을 쓰라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이것이요! 하고 내놓을 것이 없다. 내가 광복되던 이듬해 집을 떠나 유랑하는 동안 그 분의 성화(聲華)를 듣고 예참(詣參)할 것을 바랐으나 그것이 1953년 봄에 이르러서야 범어사에서 처음 뵙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과묵하시고 위엄스러우신지라 공연한 말씀 없으시고 나 또한 감히 말씀을 건네지 못하니, 80년10월에 입적하시기까지 그저 속담에 소 닭보듯 따라다닌 셈이니 무얼 얻은 것 있으랴?
   옛어른 중에는 智與師齊하면 減師半德이요 見過於師하야사 方堪傳授라‘ 하신 분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제자가 스승보다 나아야 그 집안이 지탱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스승의 지혜와 비슷하기는 고사하고 그분의 정확한 모습이 무엇인가 조차도 모르는 내가 반성반각(半醒半覺)의 상태에서 붓을 들다니ㆍㆍㆍ.
   마음에 드셔도 또는 거슬리셔도 그저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 내가 당신의 모습을 회상하려 해도 하지 못하는 작태 앞에 보이는 듯하다.
   내가 처음 그분에 대해 알고 있기는 왜정때 열렬히 독립운동을 하시던 사상가이며, 내외(內外)학문에 조예가 깊으신 석학이었기 때문에 그분 앞에 경을 펴면 모든 것이 좔좔 이해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칠판 앞에서 번역된 경전을 강의하실 땐 참으로 자상히 말씀해 주시는데 나에게 찬주(纂註)를 보라 하시고는 이렇다 할 설명을 해 주시기 않는게 야속했었다.
   죽으나 사나 혼자 종일 보아서 이튿날 바쳐 보면 의례 한두번 고개를 좌우로 저으시는 일을 당하곤 했다. 물론 잘못 보았다는 판정인 것이다. 이렇게 답답하게 공부를 하자니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는 이런 말씀을 드려 보았다. “경전을 우리말로 현대인에게 맞게 개편해서 가르치고 배우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여쭌 뜻은 당신은 현대학문도 섭렵하셨고, 독립운동을 하시기 위해 외국출입도 하셨고, 한문학에 깊은 조예도 있으시고 하니 대담하게 현대화 하심이 어떨지요? 한 것인데 그분의 대답은 예상외로 이러했다.
   “종교, 특히 부처님 말씀에는 현대도 구대도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어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왜 경을 번역해서 프린트를 하시고, 또 그것을 승속을 모아놓고 열심히 알기 쉬운 말로 강의를 하시는가? 그러면서 왜 나에게는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하시는가? 함이었다. 감히 외람된 사례이지만 공자의 제자 자로가 그 스승을 찬탄한 말씀에 “우러르면 더욱 높고, 뚫어보면 더욱 굳다. 잠시 전에 앞에 계셨는데 홀연히 뒤에 계시도다” 한 것에나 견줄까?
   그래서 하루는 도저히 경업(經業)을 계속할 수가 없어 그만 두어야겠다고 사뢰었더니 “속효심(速效心)을 버리라”고 일러 주셨다. 옛날 어른들도 보고는 또 잊고, 잊고는 또 보고 해서 성취하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을 들으니 약간 용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어른의 또 한 가지 측면을 회상한다면 매우 부지런하시고 규칙적이셨다는 것이다. 첫째 기침과 취침시간을 꼭 지키셨고 조석으로 일과를 하시는 것도 언제 뵈어도 꼭 같으셨다. 언젠가는 시봉하는 철부지들이 아침일과 끝에 “노스님은 그렇게 도덕이 높으시니 극락가실거야 걱정없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조석으로 염주를 세면서 그렇게 염불을 많이 하십니까?" 하였단다.
   그렇게 무섭고 엄하신 분인데 어린애들에게는 똑같이 어린애가 되어 주시는 재주가 있으셔서 그런지,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극락이야 어찌 바라겠니? 그저 죽을 때 고생이나 안했으면 해서 발원하는거란다”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책시간이라든가 쉬는날 가까운 곳으로 간단한 나들이를 하시는 것이 거의 규칙적이셨다. 특히 사람을 대하실 때엔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시나 뜻이 맞는 이와 자리를 같이하실 경우 호탕한 웃음으로 좌중을 즐겁게 하셨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말해야 할 경우에는 좀처럼 말려들지 않으시는 것이 그분의 특징중의 하나였다.
   언젠가는 저명한 거사 한 분이 찾아와서 이야기 끝에 “왜 스님들이 그렇게 싸우는지 모르겠다” 고 개탄하니 그분께서는 “중은 세상일과 도닦는 일을 겸해서 다 잘해야 한다오. 하하”라고 하셔서 향기로운 덕성을 보이셨다.
   그분의 특징을 하나 더 든다면 경제관념이 뚜렷하시다는 점일 것이다. 누군가가 책을 만들어 보시라고 우송하거나 인편, 또는 직접 가지고 오면 꼭 그 책의 정가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으셨다. 얼핏 보기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친 것인데 그 값을 내시다니ㆍㆍㆍ 그것도 정가되리만치만ㆍㆍㆍ 그러나 생각해 보면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흉내라도 내어보아야할 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잔심부름을 시키면 다녀온 뒤 물목과 돈을 맞추어 나머지를 도로 회수하신다.
   뿐만 아니라, 당신 개인에 소용되는 금품이나 직계 권속들에 쓰이는 돈은 비록 사중돈으로도 이미 샀더라도 기어이 갚으시는 것을 보아왔다. 퍽 째째한 노장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큰 돈을 선뜻 내놓으실 줄 아는 힘도 가지고 계셔서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어느날 시봉하는 아이편에 예금통장과 도장을 주어 얼마만치만 찾아오라고 했는데 이 아이가 통장에든 돈을 몽땅 찾아가지고 달아나서 얼마 뒤에야 죄송하다는 편지만 한 장 날아왔다. 곁에서 어린애들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셨느냐고 여쭈니, 그 돈 가지구 공부시킨 셈 잡지ㆍㆍㆍ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다.
   어디까지나 내게 딸린 문제는 내가 책임지거나 갚는다는 생각이신듯 했다. 이 보답의 법칙, 보은의 법칙을 가장 잘 보여 주시다가 가신 예가 있다. 그분은 6ㆍ25사변 때 부득이한 사정으로 피난을 못 가셨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9ㆍ28수복 때 아군에 의해 부역자라는 혐의로 묶여가셔서 창동에 있던 어느 창고에 갇히셨다. 이때 그 문하에서 이력을 마친 임성진이란 스님이 양주 경찰서장 가창현씨를 잘 아는 터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가서장을 찾아가 구명을 호소했고, 가서장은 즉시 수소문하여 갈매벌판 사형장으로 끌려나온 그분의 신원을 보증하고 사형직전에 구제해 드렸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가서장에게 은인께 드리는 글이란 편지를 보내고, 가끔 찾아보시기도 하셨었다.
   이런 사유로 나도 그 댁에 매년 두어차례씩 들렸는데 기독교인인 그는 “내가 알기로는 운허스님만치 학덕이 높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존경했어요”하는 말을 누누이 하더니 그도 금년 봄에 돌아가셨다. 
   이렇게 위태로운 고비를 넘기시고 회갑되시던 해인 1952년 본사를 떠나셔서 남쪽으로 가시다가 당시 안성 청룡사에 계신 임성진스님께 들렸더니, 귀하신 몸이 전한에 희생되어 돌아가실뻔 했다가 이제 혼자 떠나심을 애석히 여겨 회갑상을 차려드렸는데 그때의 감회가 퍽이나 깊으셨던지 일기장 귀퉁이에다 부(賦) 일수(一首)를 남기셨다.
   이것이 그분의 저술 전부이자 마지막이다. 말씀이 없으시듯, 글로도 남기시지 않으려는 겸허하신 뜻을 그분의 유언에 견주어 보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중이 죽은 뒤에 버선 한 켤레만 남아야 한다.”
   이것이 그분께서 임종때까지 가끔 하시던 말씀이다. 이제 그 회갑일(回甲日) 자부(自賦)는 마치 빈 방에 놓여진 한짝의 버선 같으나 천하인(天下人)이 먹고 써도 남을 성도 싶기에 여기에 소개하고 끝맺는다.
   落魄踽凉萍水客 感君爲設睟觴淸
   効忠初志便成夢 學佛半生空負名
   ㅇㅇ幽明俱有憾 ㅇㅇ存沒最關情
   回頭六十年來事 欲哭旋笑自不平
   이 구차한 나그네를 위하여 그대 회갑상을 차려 주니 고맙소 나라 위하잔 뜻도 꿈결의 일이요.
   부처를 배우노라 함도 헛소문 뿐일네
   ㅇㅇ죽어간 것 못내 아쉽지만
   ㅇㅇ소식 모르니 더욱 애닮소
   60년 지난일 뒤돌아보니
   울려다 웃으니 이상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