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기에 기적일 수 있었던 일

대중문화산책 / 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식터스>

2010-10-29     불광출판사

1995년 6월 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스타디움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럭비팀 중 최약체 팀으로 알려진 남아공의 국가대표팀 스프링복스가 럭비월드컵 결승전에 올라, 최강 우승 후보였던 뉴질랜드를 누르고 우승컵을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4,300만 남아공 국민들 사이에 가로놓여져 있었던 인종차별이라는 오래되고 단단했던 갈등의 벽이 스포츠로 인해 단숨에 허물어진 사실이다.
정치범으로 27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넬슨 만델라가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이 1948년 법률화했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차별 정책)가 청산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흑백간의 갈등과 대립은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흑인들은 단 한 명의 흑인 선수만 속해 있는 스프링복스를 백인종의 상징으로 여기고, 국가대항전에서 자국팀이 아닌 상대팀을 응원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서로를 향한 증오는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가 스프링복스의 유니폼을 입고 스타디움에 들어선 순간, 흰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만델라의 애칭인 ‘만디’를 연호하는 순간, 그리고 그와 스프링복스의 주장 프랑소와 피나르(맷 데이먼)가 감격적인 승리의 포옹을 나누는 순간, 아무도 생각지 못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던 한 사람, 넬슨 만델라
저널리스트 존 칼린은 2001년 8월 만델라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7년간 방대한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를 집필했고, 이것이 영화의 원안이 되었다. 사실 영화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이야기 그 자체로는 크게 감동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는 얼마든지 많은 것들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한 사람이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인권을 운동을 하다 46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을 복역한 뒤 흑인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 불가능하게 보였던 인종간의 통합을 이뤄냈다면, 그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개인으로써 감당해야 했던 고난의 무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견뎌야 했던 세월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아프
리카공화국이라는 한 나라에 깊이 박혀 있는 인종차별의 뿌리가 얼마만큼 깊고 단단했는지를 안다면, 넬슨 만델라라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일들이 모두 기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아공의 총리로 당선된 얀 크리스티안 스무트의 연설에 처음 등장한 아파르트헤이트는 영국 식민주의가 도입한 통행법의 잔재이다. 흑인들의 백인구역 출입금지, 구역 간 이동시 통행증 소지, 일몰 후 통행금지 등 남아공에 대한 영국의 식민 통치 시대부터 있었던 인종분리 정책과 상당 부분 겹쳐진다. 이후 1948년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정책으로 내걸고 연합당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고, 인종차별 정책은 법률화되기에 이른다. 개인에 따른 인종분류표 제작, 인종간 혼인금지법, 인종간 시설 분리법, 인종별 분리투표 도입으로 인한 유색인종의 투표권 박탈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흑인들에 대한 철저한 차별로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시기 넬슨 만델라는 대학 재학 시절, 시위 주동죄로 퇴학을 당한 뒤 유색인종으로는 최초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설립,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수년간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던 중 결국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으며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만델라는 1991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을 거쳐 1994년 대통령에 선출되며, ‘차별이 아닌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유례없는 인종차별 정책을 완전히 폐지시키기에 이른다.


기적을 기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배제한 채 만델라 인생 중 지극히 일부만을 보여준다. 극적인 요소 또한 절제되어 있어, 결승전에 올라가기까
지 스프링복스의 경기 장면은 133분의 러닝 타임 동안 비중 있게 그려지지
않는다. 최약팀인 스프링복스에게 첫 토너먼트의 승리부터 결승에 이르는 전 경기와 승리가 모두 극적이었겠지만,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은 그 드라마틱한 과정은 과감히 생략한 채 경기 사이사이에 벌어지는 주변 상황과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와 감정의 진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우리는 스치듯 흘러갔던 이전의 경기 장면과는 달리 너무나도 꼼꼼하고 충실하게 재현되는 결승 경기를 보며, 1995년 당시의 기적에 대해 영화가 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경험하게 된다.
원작의 제목이자 영화의 제목 ‘인빅터스(Invictus)’는 라틴어로 ‘정복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19세기 중엽 영국의 저항시인 윌리엄 E. 헨리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에도 일부 등장하듯 실제로 만델라는 투옥시절 이 작품을 여러 번 암송하며 삶의 이정표로 삼았다. 짧지만 강렬한한 편의 시를 통해 만델라는 자신의 꿈과 용기를 지켰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그가 만들어 낸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7년간 좁은 감옥 안에서도 결코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복되지 않는 자들

- 윌리엄 E. 헨리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
나를 뒤덮은 밤의 어둠 속에서
어떤 신이든 내게 불굴의 영혼을
주심을 감사하노라
환경의 잔인한 손아귀 속에서도
난 머뭇거리지도 울지도 않았노라
운명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내 머리는 피 흘리지만 굴하지 않았노라
분노와 눈물의 이곳 저 너머에
유령의 공포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나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두려워하는 모습 보지 못하리라
상관치 않으리라 저 문 아무리 좁고
명부에 어떤 형벌이 적혔다 해도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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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ː영화 칼럼리스트.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석사 수료. 수년간 국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과 출판 관련 일을 했으며, 2001년부터 잡지와 웹진에 영화 및 DVD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