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가 곧 불교다

쉰다리 보살과 함께 떠나는 산사여행

2010-09-27     불광출판사

교계기자로 꽤 잔뼈가 굵은 나지만, 불교가 무어라 물으면 딱히 떨어지는 답이 없다. 그저 마음 닦는 법이고 행복으로 가는 길이랄까. 문자라도 써볼 양이면 도림(道林) 선사가 말씀하신 ‘제악막작 중선봉행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是諸佛敎,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이것이 곧 불교다.)’ 정도로 답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성철 스님이 평생을 쌓으신 수행과 깨달음의 귀결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했다면, 30여 년의 불자생활을 사찰음식을 통해 불교적 삶으로 귀결 짓고자 하는 이가 김애자(사찰음식 전문점‘물메골’ 대표)
보살이다.
제주마하보리회, 제주특별자치도 불교청소년연합회 등에서 다양한 불교활동을 하는 김애자 보살과는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게 되었다. 불교라는 공통의 화두가 인연의 고리가 되었던 듯싶다. 2008년 문을 연 사찰음식전문점 ‘물메골’은 소박한 밥상이 생각날 때면 어김없이 찾는 단골집이 되었다. 제주말로 ‘먹으멍 말멍(먹으면서 말하면서)’, 김 보살의 ‘불법’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30년 불자의 길을 엿들을 수 있었다.



수행의 힘으로 채운, 마음의 빈곤
김 보살이 불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 후 신심이 돈독한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경제적 어려움에 자식의 병까지,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굴진 삶의 역경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선방문화가 전무한 제주에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안거를 성만하는 등 그 당시 기복 불교가 팽배했던 제주불자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불심이었다.
시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아이들을 원명선원(선원장 대효 스님) 산하 원명유치원에 보내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법회 및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등에 학부모로서 참석하게 되었고, 우연찮은 기회에 대효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던 것이 30년 불자인생의 시초가 됐다. 그 후 사회복지법인(춘강)에서‘자비의 손길’ 상담원으로 활동하며 불교와의 인연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확신에 차지 않은 믿음은 ‘마음의 빈곤’을 가져왔다. 6년여 동안 상담가로 일하면서 문득, ‘내가 자격이 있을까. 마음으로 교리를 읽지 못하고 머리로만 이해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불교공부에 매진했다. 1995년 서울의 대원불교대학 통신반에 입학하여 불교를 알음알음 알아가며 조금씩 불교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즈음 도반을 통해 자명 스님(서울 마하보리사 주지)을 만나면서, 그동안 알고 지냈던 불교는 파도에 모래성이 부서지듯 허무하게 무너졌다.
“스님, 불교가 뭡니까?”라는 김 보살의 질문에 “불교란 보편적인 법이다.”라고 답을 하신 스님의 말씀을 통해 잡다한 불교 지식을 가지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금 불심은 환희심으로 가득 찼다. 매월 스님을 제주로 모시고 2박 3일 동안 담선법회(談禪法會, 참선을 하며 선을 학습하는 법회)를 열어 스님이 주신 화두를 끊임없이 참구하며 열병을 앓듯 한 달 내내 끙끙거렸다. 답을 찾아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밤새 졸음을 쫓아가며 수행에 매진했다.
고성염불로 수행 정진하는 모습은, 가족들의 눈에는 마치 사이비종교에 빠져 구출해야 하는 사람처럼 비쳤다. 남편의 질타에도 ‘남편을 불자로 바꿔야 한다’는 일념 외에는 서질 않았다. 그런 소신은 사사건건 남편과의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손등과 손바닥을 보게 된 겁니다. 즉, 양면성을 이해하게 됐어요. 나를 무겁게 짊어졌던 화두가 몰록하게 깨치듯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일체가 다 보편적이며 모든 존재가 부처임을 알게 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그물코처럼 얽힌 커다란 크기의 망으로 보였다. 자신의 고집만 내세우지 않고 남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자, 남편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감정의 선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로 부딪힐 일이 발생할 때마다 수행의 힘을 빌렸다. 화날 일은점차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인간관계가 곧 불교다’라는 관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포교의 원력으로 빚어진 사찰음식

이 소중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당신에게 불교는 뭡니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싶어졌다. 새로운 깨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김 보살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목표로 세우고, 학사 졸업장을 따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늦깎이 공부라 힘들었지만 4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고 40명 입학생 가운데 단 6명에 불과한 졸업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대학원에서는 사찰음식의 선구자인 선재 스님의 강좌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선재 스님과 인연이 닿았다. 스님을 초청해 강연도 열고, 제주도 불자들에게 사찰음식의 묘미를 전했다. 또 계절별로 ‘선재 스님 초청, 사찰음식 강좌’를 개최하는 등 사찰음식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김 보살에게 있어 대효 스님과의 만남이 불교와 인연을 맺도록 해준 계기였다면, 사찰음식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원종 스님(관음사 주지)이다. 관음사 일주문 근처에 ‘산소리’라는 전통찻집의 운영을 맡아달라는 스님의 부탁이었다. 관음사는 제주불교의 상징이다. 제주불자들의 신앙의 중심이자 어머니 품과 같은 관음사에서 제주불자들을 대상으로 사찰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부담감이 컸어요. 사찰음식이 전무했던 제주에서 그것도 관음사를 배경으로 불자들에게 사찰음식을 전한다는 것은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비록 ‘산소리’와의 인연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끝으로 다하고 말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사찰음식 전문점 ‘물메골’ 탄생의 배경이 됐다. 물메골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사찰음식의 바람을 타고 어느새 도민들의 마음을 쉬게 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수행
김 보살이 ‘물메골’의 주 메뉴인 연밥을 내온다. 불교의 상징인 연밥은 약성이 뛰어나고 버릴 것하나 없는 최고의 음식이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고 과일을 갈아 맛을 낸 김치, 씹는 맛이 마치고기를 먹는 듯한 ‘콩고기’, 금방 부친 담백한 ‘호박전’ 등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으로 재료의순수한 맛을 그대로 살린 소박한 밥상이다.
새색시처럼 예쁜 연잎에 싸여 나온 연잎밥. 연잎을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반지르르 흐르는 윤기에 은행과 잣이 연지, 곤지 바르듯 정말 새색시가 따로 없다. 뚝배기에 끓여 나온 강된장을 발라 한 잎 떠 보았다. 연잎특유의 향긋함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찰지고 촉촉한 쌀알들도 자신의 촉감을 느껴달라고 입안에 찰싹 붙어 쫄깃함을 안겨준다.
마지막으로 여름철 제주사람들이 음료수로 즐겨 마시던 ‘쉰다리’가 백미를 장식한다. 쉰다리는 제주사람들이 척박한 삶을 이겨내고자 근검절약했던 지혜의 산물이다. 여름철 먹다 남은 쉰보리밥을 깨끗이 씻어 누룩 몇 점 넣으면 자동발효가 되는데 건강에 좋은 유산균은 물론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정말 일품이다. 쉰다리를 맛본 선재 스님은 “쉰다리는 제주식 요구르트다.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고 적극 추천할 정도였다. 연밥이 사찰음식을 상징한다면 쉰다리에는 옛 제주선조들의 향토음식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김 보살의 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김 보살은 포교의 양면성을 본다. 꼭 부처님의 교리 공부를 통한 수행법만이 불법을 전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 대신 몸과 마음을 살찌울 수 있는 사찰음식을 통해서도 포교를 할 수 있음을…. 우리의 삶이 실타래처럼 엮여있듯 포교의 방편 또한 한 축을 꿰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