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산장과 영우사 사리탑, 열하천

열하 기행 1

2007-01-22     관리자


지금으로부터 226년 전인 1780년, 연암 박지원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을 거쳐 열하(熱河)를 다녀왔다. 지금은 승덕(承德)으로 불리는 그곳은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에 머무는 별궁이 있는 곳이었다. 이름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 강희제 때 조성하기 시작해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완성을 본 이 거대한 여름 별장은 청나라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추억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는 명소 가운데 하나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남기고 있는 기록이나, 그 밖에 근래의 몇몇 여행객들이 남긴 답사기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이곳에 대한 환상 또는 이미지를 안고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북경역에서 승덕까지 가는 열차는 하루에 한 대밖에 없었고, 직선거리로 300km가 넘는 곳이지만 그 동네에서는 가까운 거리라 항공편은 아예 없었다. 그나마 8월 중순이 피서 시즌이어서 우리는 열차 표를 구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와 아내, 가이드 세 사람은 수소문 끝에 국도를 통해 승덕으로 가는 마이크로버스에 몸과 짐을 싣고 가야 했다.
문짝을 전깃줄로 묶어 달아 놓은 버스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70년대에나 볼 수 있는 차였다. 폐차 처리 되고도 한참이나 지났을 차들이 중국에는 꽤 많이 굴러다녔다. 비좁고 허름했지만 대신 편하게 갔으면 보지 못했을 중국의 이면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점은 있었다.
산 도적처럼 웃통을 다 벗고 호객 행위를 하는 버스 차장이나 역시 맨 몸을 드러낸 운전사의 모습이 호기심과 함께 은근히 만주 비적떼(?)를 연상시켜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 시간 남짓 동행한 그들이나 승객들은 짧은 만남이긴 했지만 친절하지는 않았어도 순박해 보였다.
해가 질 무렵 승덕에 도착한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 지친 하루 일정을 마감했다. 인구가 약 30만쯤 된다는 승덕시는 강원도 산간에 있는 도시를 연상시켰다. 날씨는 더웠지만 습기가 없어 오히려 한국보다 쾌적했다. 완만하지만 제법 운치도 있는 산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는데, 넓은 곳이든 좁은 곳이든 평지면 거의 모든 곳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북경부터 승덕까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 많은 옥수수를 심었고, 거둘 것이며, 먹을 것인지 엉뚱한 궁금증이 일었다.
승덕에서 볼 만한 곳은 당연히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다. 피서산장은 휴양지면서 행궁의 기능을 해 180여 동의 각종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간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 파괴되거나 철거된 건물도 많았는데, 주로 산장의 동남쪽에 자리한 호수 주변에 몰려 있다. 무열하(武烈河)를 끼고 도로를 올라가면 산장 북쪽과 동쪽으로 열을 지어 건축되어 있는 것이 외팔묘다. 말 그대로 산장 외곽을 끼고 도는 여덟 개의 불교 사찰이다.
피서산장은 여름 3개월 동안 황제가 거처한 곳답게 정무를 볼 수 있는 공간과 여흥을 즐길 수 있는 건물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사찰 건물이 많은 것은 뜻밖이었다. 안내도를 보니 10군데의 사찰이 산장 내에 흩어져 있는데, 아쉽게도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영우사(永佑寺) 한 곳뿐이었다. 이마저도 출입이 통제되어 내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 남산적설에서 바라본 영우사 사리탑과 경추봉

건륭 16년(1751년)에 건축된 영우사는 천왕전이나 종고루, 어용루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사리탑으로 불리는 탑이 단연 압권이다. 영우사 경내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웅장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항주의 육화탑(六和塔)과 남경의 보은사탑(報恩寺塔)을 본떠 지은 팔각형의 건물로, 높이가 무려 67m에 이른다. 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불러야 온당할 것이다.
팔면의 벽에는 불상이 부조되어 있어 청나라 황실이 얼마나 독실하게 불교를 신앙했는지 말해준다. 산장 호수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탑은 노란 탑신이 황혼의 햇살에 물들면 온통 금빛으로 빛나 찬란한 광채를 자랑한다.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긴 하지만, 다들 비슷비슷해서 다소 실망을 안겨 줄 때 이 탑을 보게 되면 독특한 구성과 색채 때문에 한동안 발길을 옮기지 못하게 만든다.
청나라 황실은 불교, 그 중에서도 특히 라마교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티벳불교를 일컫는 라마교는 인도불교가 티벳의 고유 신앙과 결합해서 이루어진 교파의 하나다.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들이 이들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지도자다. 정통 중국불교는 어디 가고 라마교 사원들이 이곳을 점령했는지 의아했는데, 까닭을 알고 나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수적으로 극소수이면서 거대한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그 열세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만주족의 고유 신앙이기도 했고, 잠재적인 적국인 몽골족들의 신앙이 라마교라는 점이 더욱 라마교를 신봉하게 부채질했다. 차츰 중국화되어 가는 만주족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고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북방 열하에 별장을 지은 것처럼 그들은 라마교를 통해 동질감을 지키면서 정신적 평화와 기도처를 구했던 것이다. 황제조차도 라마교 지도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그들은 신앙을 통한 사해동포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산장은 크게 호수 지역과 삼림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삼림 지역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건물이 거의 터만 남아 있어 볼거리가 많지는 않다. 산세도 험준해서 도보로 관람하기는 어렵고, 순환 버스를 타면 30, 40분 정도면 얼추 구경이 끝난다.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인데, 시간만 넉넉하면 등산 삼아 돌아보아도 좋을 듯했다.
산장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호수 지역은 여섯 개의 호수와 섬, 그리고 섬을 잇는 다리 및 제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수의 물은 무열하에서 유입되는 것과 한때 지역 이름을 대표했던 열하천(熱河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 공급된다. 이 호수와 섬 사이 어디에 서 있든 다채로운 경치가 눈길을 끈다. 인공과 자연이 잘 조화를 이루었다고 할까. 정자며 전각, 그리고 행랑 등이 서로의 전망을 침범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에 배치되어 있어 이곳을 경영하는 데 들인 청 황실의 노력과 정성을 실감하게 한다. 호수 주변에는 방목해 놓은 사슴들이 유유자적 노닐고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린 그 옛날 산장의 기화요초와 이국적인 동물 대신이라고 하기엔 지금의 열하를 거닐고 있는 사슴은 너무 초라하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열하천도 기대만큼 웅장하지는 않았다. 꽤 넓은 연못에 감싸여 있는데, 폭이 꽤 넓은 수차가 설치되어 물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온도는 시원했다. 열하(熱河)라더니 뜨겁지 않아 이상했는데, 사계절 온도가 변하지 않아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질 테니, 이름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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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1962년 경북 예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현재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부(賦)문학에 대한 역주 해제 작업을 진행 중에 있고, 한국 불교문학을 정리한 『불교문학 산책』을 집필하고 있다. 저서에 『고려시대 문학의 연구』와 『운곡 원천석과 그의 문학』, 『한국 한문학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고, 편저에 『동양문학비평용어사전』, 『고사성어대사전』, 『동양학 대사전』(전4권) 등이 있으며, 『몽구』와 『논어』, 『명심보감』 등을 번역했고, 역사추리소설 『소정묘 파일』(1, 2권)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