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들을 위한 씻김굿

대중문화산책 / 영화 <굿'바이 : Good & Bye>

2010-08-31     불광출판사

죽음은 인생에서 겪고 싶지 않은 가장 비극적인 일로 여겨지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를 알 수 없을 뿐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다. 결국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도 그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살아있는 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좋은 직장과 행복한 가정을 꿈꾸고,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차를 타고, 넓은 집에서 살기 위해 일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잔인하리만치 공평한 이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경외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2009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등 13개 부문의 상과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등 이미 영화제를 통해 작품성을 보증받은 영화 <굿’바이>의 소재는 바로 ‘죽음’이다. 영화는 납관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첼리스트 다이고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의 이미지’를 새롭고 신선하게 그려낸다. 끝, 이별, 슬픔, 비극…, 한없이 무겁고 아프기만 한 죽음이 때로는 삶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굿’바이>는 놀랍도록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죽은 자를 배웅하는 자
어렵사리 들어간 오케스트라의 해단으로 순식간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다이고는 빚을 내서 산 첼로를 처분하고 부인과 함께 상속받은 시골집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던 중, ‘연령제한 없음, 초보 환영, 고수익 보장, 여행 도우미’라는 광고를 본 다이고는 들뜬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가지만 알고 보니 광고를 낸 회사는 납관전문업체. 경험은커녕 해보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았던 납관사라는 직업에 거부감을 갖지만 엉겁결에 일을 맡게 되고, 어느 새 죽은 자를 보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한편, 남편이 취직한 회사가 납관전문업체라는 걸 알게 된 부인 미카 역시 처음에는 다이고를 경멸하지만 목욕탕집 할머니의 장례식을 지켜본 뒤 남편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고는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된다. 카페 종업원과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뒤 30년 만에 닿은 연락이다. 평생 증오와 원망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며 살아 왔기에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 앞에서 오랜 세월 쌓였던 미움은 모두 허망해지고, 그는 정성을 다해 차가운 시체를 닦고 또 닦으며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를 한다.
<굿’바이>의 모티브가 된 작품은 ‘아오키 신몬’의 <납관부일기>로, 다이고를 연기한 ‘모토키 마사히로’는 1996년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아모키 신몬을 찾아가 영화화의 허락을 받아낸다. 그러나 작가와의 의견차로 인해 영화는 결국 완전히 별개의 작품으로 제작되었고, 제목 역시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로 수정되었다. 이 작품의 일본어 원제인 오쿠리비토는 보내는 사람, 배웅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되는데, 일견 영화의 주인공 다이고를 의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죽은 자를 보내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보 납관사 다이고는 마을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자신이 가졌던 죽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신의 핏줄, 즉 아버지를 보내면서 정점에 달한다. 납관사 다이고의 손을 거쳐 나가는 (죽은)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그는 어느덧 ‘죽음’과 ‘슬픔’에 익숙한 듯 보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그 불길함은 경건함으로, 두려움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건 사실 타인의 죽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체득한 나름의 경험은 30년간 연락이 닿지 않아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만다. 정확하고 계산된 손놀림으로 죽은 자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염을 했던 납관사 다이고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죽은 아버지를 대면한다.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고 살아. 죽기 싫으면 먹는 수밖에 없어. 기왕 먹을 거면 맛있게 먹어야지”
아무리 겪어도 ‘죽음’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이다. 죽음의 주체가 된 자는 이미 세상에 없기에 그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부모의 죽음, 자식의 죽음, 친구의 죽음처럼 타인의 죽음일지라도 이 또한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슬픔과 고통만 줄 뿐이다. 이것이 죽음이 슬프고 두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슬픔과 두려움의 감정 때문에 모든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세상을 살면서 죽음만큼 격한 슬픔과 고통을 주는 일이 또 있을까? 남은 자는 후회와 안타까움에 큰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다른 차원의 성장을 하게 된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다이고는 죽은 부인의 사진 앞에서 뻔뻔할 정도로 맛있게 밥을 먹는 사장의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죽은 자에게 느껴할 감정은 미안함이 아니라 살아 있기에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감사의 마음임을, 그리고 그것이 산 자의 소명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은 자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때론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헛되지 않은 건 그것이 슬프기 때문이다. 슬픔의 고통을 이겨낸 산 자들은 그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신기하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많은 감정들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촉발될 수 있다. 그건, 가까이서 죽음을 지켜 본 사람들의 특권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산 자에 대한 죽은 자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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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ː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석사 수료. 수년간 국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과 출판 관련 일을 했으며, 2001년부터 잡지와 웹진에 영화 및 DVD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