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우리는 행복합니다

상상하고 가지 마라! 미얀마 1 / 양곤

2010-06-24     관리자
↑쉐다곤 파고다. 탑의 높이는 무려 99.7미터에 이른다. 양곤은 법적으로 쉐다곤 파고다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
탁발 _ 세상과의 소통
2007년 여름, 미얀마의 풍경은 비참했다. 당시 한 무리의 스님들이 탁발을 위해 거리를 나섰다. 하지만 발우는 차지 않았다. 대중이 많은 수행처에서 탁발을 나가면 보통 발우를 한두 번씩 비우고 다시 탁발을 돌아야 할 정도였지만 날이 갈수록 발우는 비어만 갔다. 어느 사찰의 어떤 스님이 어딜 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스님들도 세상의 처지와 인심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민초들의 삶은 점점 강퍅해져 가는구나!”
저간의 사정은 이러했다. 2007년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는 내부 봉기가 두려워 갑작스레 양곤을 버리고 수도를 네피도로 옮겼다. 구멍난 국가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석유와 천연가스비를 서너 배씩 올렸다. 미얀마인들의 90퍼센트는 하루 1달러 이하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중에 교통비로 반을 쓰고 나머지는 식료품비로 반을 소모한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물가는 500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걸 즐거워하고 최고의 영광으로 알던 미얀마 국민들이다.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공양을 올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민중들이 굶자 승려들도 굶었다.

↑마하시 선원 스님들의 탁발 풍경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일단의 스님들은 양곤의 상징 쉐다곤 파고다에 모였다. 맨 앞줄의 스님들은 부처님상과 불교기를 들었다. 민중들은 그 뒤에 줄지어 늘어섰다. 이내 군중은 10만이 넘는 숫자로 불어났고 자연스레 양곤의 중심가 슐레 파고다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슐레 파고다 앞에 대열이 도착하자 그들을 기다린 건 총을 든 군인들이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외신을 통해 너무나 많이 알려졌다. 스님을 비롯해 수백 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스님들은 체포되거나 망명을 했다. 시위의 현장이라고 해서 몇몇 사원은 폐쇄되었으며, 결국 시위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마무리 되었다. 거리에 남은 건 시위대가 남긴 슬리퍼더미뿐이었다.
탁발은 수행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짓게 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 하나의 장면을 상상하며 떠올랐던 건 세상과 떨어져 살던 스님들에게 탁발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했던 셈이라는 것이다.

↑마하시 선원 스님들의 탁발 풍경
탁발은 고행이다 _ 마하시 선원의 탁발 풍경
양곤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 일찍 호텔을 빠져나와 마하시 선원으로 향했다. 탁발하는 스님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얀마는 현재 자타공인 위빠사나의 종주국이다. 그 중심에 마하시 선원이 있었다. 마하시 선원은 1940년대 말 마하시 선사(1904~1982)가 이곳에서 수행지도를 하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마하시 선원은 국내 불자들에게도 꽤 친숙하다. 위빠사나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부터 꽤 많은 한국의 스님들이 마하시 선원을 거쳐갔다. 내가 방문한 때에도 세 명의 한국인 비구니스님이 마하시 선원에서 정진 중이었다. 물론 지금은 양곤에서 버스로 여섯 시간 거리에 있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파욱 선원 등에서 한국인 스님을 더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새벽 5시가 좀 넘은 시간에 마하시 선원에 도착하자 공양간으로 향하는 수행자들의 행렬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두 시간의 정진을 마치고, 원하는 스님들에 한하여 아침 공양이 허락된다. 물론 오후에는 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철저히 금지된다. 간단한 공양이 끝나고 스님들은 탁발을 나갈 준비를 했다. 아직 우안거가 시작되기 전이라 50여 명 남짓한 스님들 정도만 보였다. 이내 선원의 문이 열리고 꼬리에 꼬리를 문 스님들의 행렬이 저자거리로 향했다.
탁발 행렬은 마하시 선원과 가까운 상점가와 주택가를 두루 거쳐 두 시간 정도 후에 다시 선원으로 돌아왔다. 말이 두 시간이지 걷는다는 것 그리고 밥을 빈다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아침 무렵이었지만 이미 기온은 30도를 넘어서고 있었고 게다가 탁발에 나선 스님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여유로운 걸음이 아니라 바툰 걸음이었다. 문을 나선 지 20분 정도가 지나자 가사는 땀으로 물들었다. 양곤은 미얀마의 중심도시다. 그나마 시멘트나 보도블록이 깔린 곳이 많은 지역이다. 맨발로 탁발을 나서야 하는 스님들에게는 이게 더한 곤욕이었으리라. 묵언을 하고 탁발을 하던 스님들은 외려 내가 안쓰러웠는지 공양물로 받은 물을 내게 건네기도 했다.
↑ 쉐다곤 파고다 안에 있는 보리수. 1926년에 심었지만 우기가 반복되는 미얀마 날씨 탓에 천 년을 훨씬 넘는 나무처럼 보인다.
탁발이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탁발 행렬은 ‘슬럼가’로 느껴지는 양곤의 뒷골목을 돌았다. 양계장처럼 다닥다닥 붙은 이층집들 사이로 그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이 전해왔다. 하지만 스님들이 지날 때마다 그날 공양을 올리기로 약조했던 집들은 온 가족이 나와 옆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놓고, 자신의 주린 배를 채워야 마땅할 쌀을 올렸다. 그때 그들의 표정에서 행복감을 읽은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걸린 탁발을 끝내고 행렬은 선원으로 돌아왔다. 이제 탁발을 끝낸 스님들에게는 7시간의 좌선과 7시간의 경행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 단체 관광 코스에 탁발 참관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일행에서 빠져 나와 새벽 일찍 가까운 선원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탁발에 참관하는 일은 수많은 불탑이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 될 것임을 장담할 수 있다.







↑ 차우타치 사원에 있는 부처님 휴식상. 휴식상과 열반상을 구별하는 기준은 발모양이 일자로 겹쳐 있느냐(열반상) 틀어져 있느냐(휴식상)이다.
미얀마인이 불교 역사상 최초의 탑이라고 믿는 _ 쉐다곤 파고다
미얀마에서 움직이는 것 중 최고의 모습을 꼽으라면 역시 탁발을 비롯한 스님들의 수행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것 중에 최고는? 단연 쉐다곤 파고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최초의 재가자는 ‘타풋사’와 ‘발리카’라는 두 상인이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니다나 가타』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기념으로 받은 두 상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머리카락을 넣은 탑묘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탑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양곤을 대표하는 쉐다곤 파고다가 바로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봉안한 탑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지금 볼 수 있는 것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다. 이후에 왕들이 금을 덧붙이고 덧붙이기를 거듭하면서 9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 되었다.
↑로카찬다 사원의 옥불. 세계에서 가장 큰 옥불이다, 무게만 500톤이다. 2000년에 시민에 개방됐는데 옥불 이동시 우기임에도 보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
쉐다곤 파고다는 감동적이다. 99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크기와 이를 모두 황금으로 장식한 정성, 그리고 수만 명이 동시에 머물러도 넉넉해 보이는 공간은 전 세계 어디를 통틀어도 으뜸이 될 것이 틀림없다. 미얀마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도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또 사랑을 했다. 규모만 크고 사람이 없었다면 이런 감동을 느끼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곤에서 돌아볼 만한 유적은 이 밖에도 많다. 차우타치 사원에 있는 부처님 휴식상이나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는 쉐도 사원, 세계에서 가장 큰 옥불이 있는 로카찬다 사원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