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본성’ 사수

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

2010-06-24     관리자
말이 적을수록 태평한 세상

차나 마셔, 걍!

-『조주록(趙州錄)』

말은 생각의 그릇이다. 사람은 언어에 사유를 담아 자기가 먹거나 남들에게 나눠준다. 혼잣말을 할 때에도 철학을 할 때에도 언어가 필요하다. 생각의 깊이가 데카르트 뺨치더라도 말로 나타내지 않으면 벙어리 취급이나 받기 십상이다. 밥 없이 못 살듯 말 없이 못 산다. 거래를 트기 위해 속삭이고 이익을 가르기 위해 지껄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유산을 요구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며 동네 깡패들에 대한 복수를 당부한다. 젖먹이는 요람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말을 하고, 늙은이는 좋은 무덤을 써달라고 말을 한다. 끊임없이 육지와의 교신을 시도하는 난파선처럼, 주야장천 말을 주고받으며 삶의 파고를 타넘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야….’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아!’ 서로 겸상하지 못할 글줄인 듯해도 의미의 내막은 엇비슷하다. 나 좀 알아달라는 속셈이다.
‘人平不語 水平不流(인평불어 수평불류)’, 2008년 8월 27일 열린 범불교도대회 당시 회자되던 격언이다. 고위공직자들의 마구잡이 종교편향, 개신교 인사 중심의 권력 카르텔 추진에 끼얹은 찬물인데, 이제와 다시 봐도 시원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평등하면 원망의 말이 없고, 수면이 평평하면 한쪽으로 물길이 쏠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구(對句)는 한결 날카롭다. ‘水可載舟 亦可覆舟(수가재주 역가복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으름. 물에 민심을, 배에 국가를 대입하면 혁명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백성들의 불만이 많을수록 임금의 입지는 위태로워지고, 말이 많은 세상일수록 난세라는 것인데, 뒤집어 보면 말이 적은 세상일수록 태평하다는 얘기다. 분배와 조정이 넉넉하고 푸근한 사회에선, 구태여 목젖이 붓도록 ‘내 몫’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니까. 개인적으로 남들의 몫까지 일일이 챙겨줄 수 없는 처지다. 그저 웬만하면 말을 아끼며 일상을 버티는 게 내가 주변에 봉사하는 방법이다.


마음에 줄긋지 마라

우리 종문(宗門)에는 말이나 문자가 없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는다.

-덕산선감(德山宣鑒, 782~865), 『오등회원(五燈會元)』

조주구자, 조주백수, 조주끽다, 조주세발, 조주무난, 조주문도, 조주분소, 조주양화…. 조주종심(趙州從 , 778~897) 선사가 주인공인 선문답 가운데 알짬만 추려도 이만큼이다. ‘개에겐 불성이 없다’는 조주구자(趙州狗子)는 오늘날 한국의 선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두로 손꼽힌다. 부처님은 발톱의 때 같은 미물조차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건만, 선사는 무슨 억하심정에선지 유독 개에게는 깨달음을 기대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조주백수(趙州柏樹)는 전통찻집의 상호명이나 블로그의 문패로 심심찮게 이용되는 ‘뜰 앞의 잣나무’를 이른다. 누군가 진리에 대해 묻자 뜬금없이 마당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던, 역사적인 ‘동문서답’이다. 조주의 ‘포스트모던’한 말 씀씀이는 으레 구순피선(口脣皮禪)으로 불린다. 입으로 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인데, 장광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달변이었다. 그의 말들은 하나같이 짤막하고 건조했다. 남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데 필요한 문장은 한두 마디면 족했다.
누군가 도(道)에 대해 물으면 매우 쉽다면서도(무난, 無難), 막상 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면 헛수고라며 말렸다(문도, 問道). 잠자코 차나 마시거나(끽다, 喫茶), 밥그릇이나 닦으라고 타일렀다(세발, 洗鉢). 5년이 넘도록 아직도 도에 대해 설명할 줄 모른다고 잡아뗐고(분소, 分疏), 심지어 부처님이 계신 곳엔 얼씬도 하지 말라(양화, 楊花)고 다그쳤다. 극히 경제적인 입담으로, 깨달음에 연연하면 혀를 찼고 부처님을 그리워하면 혼을 냈다. 마음에 글자를 새기거나 의미를 덧씌우지 말라고 가르쳤다. 분별하지 않으면 선악(善惡)과 미추(美醜), 청탁(淸濁)과 성속(聖俗), 정사(正邪)와 우열(優劣)이 한통속으로 모여든단다. 마음에 줄을 긋는 순간, 세상의 절반은 폐허가 된다.


내 귀에 티끌

마당을 쓸고 있는데 어떤 객승이 물었다. “화상은 대선지식이신데 어째서 마당을 쓸고 계십니까.” “티끌은 바깥에서 들어온다.” “이미 청정한 가람인데 어째서 티끌이 있습니까.” “티끌이 또 한 점 생겼구나!”
- 『오등회원』

조주 선사는 무심(無心)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비질을 한다는 생각도, 비질을 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다. 행위와 자아가 일치된 상태다. 곧 부처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깨는 불청객. ‘화상(和尙)’이라는 존칭대명사와 ‘청소’라는 목적어로써 선사의 상태를 주체와 객체로 갈라놓는다. 그 사이로 번뇌가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객승은 한술 더 떠 ‘화상은 대선지식인데 어째서 마당을 쓸고 있느냐’며 비위를 긁는다. 표면적으로는 안타깝다는 의미다. 하지만 번뇌가 옷을 다 버려놨기에 곱게 봐주기가 어렵다. ‘지체 높으신 분이 왜 허드렛일 따위나 하고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린다. ‘청소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자의식, ‘절이 깨끗해지고 있다’는 보람과 함께 ‘큰스님인데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불쾌감, ‘아랫것들은 다 어디로 도망갔느냐’는 분노 등등 분별망상의 물꼬가 터진다. 세탁소에 맡겨도 어림없는 지경이다.
‘티끌은 밖에서 들어온다’는 푸념의 이유다. 그럼에도 객승은 따귀를 부르는 언행을 멈추지 않았다. 절밥을 계속 얻어먹기엔 눈치가 백치다. 내무검사에 임하는 당직사령처럼, 눈에 보이는 청결에만 혈안이 된다. 마음에 묻은 티끌이 절 안에 뒹구는 티끌보다 더럽다는 것을 도통 깨우치지 못한다. 그러니 한 소리를 더 듣지. 큰스님, 몸져눕겠다.


녹차의 최대 효능

법좌에 올라 외치길, “봐라! 보라니까! 산승이 발설(撥舌)지옥* 에 들어간다.” 손으로 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야! 아야!”

- 보령인용(保寧仁勇, ?~?), 『오등회원』

* 발설지옥: 구업(口業)을 많이 지은 자가 죽은 뒤 가게 되는 지옥. 혀를 뽑는 형벌을 당한다.
대통령은 말이 적다. 많다 해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훈령과 담화문, 대부분 문건으로 대체된다. 영부인과 아침에 대판 싸웠다거나, 족집게 과외를 붙여줬는데도 아들의 성적이 신통치 않다든가 운운. 비루하지만 진솔한 잔말들은 옆에 있던 보좌관들이 받아먹어 없애버린다. 말들에 넥타이를 채우고 구두를 신긴다. 특히 공식 석상에선 갈고 갈아 몽글몽글해진 말들만 사용한다. 기자들이 보고 있으면 대놓고 욕하거나 넋 놓고 울지 않으며 덮어놓고 웃지 않는다. 야당은 부디 그의 입에서 잔말이 터져주기를 기원한다. 잔말에 비자금이나 성희롱이 섞여주면 대박이다. 물론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감정의 절제와 적절한 어휘 선택에서 권력의 내구성이 가늠된다.
주먹을 함부로 썼다간 패가망신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몇 가지 룰을 정해놓고 권력을 다툰다. 법률과 여론에 대한 존중 그리고 말에 대한 믿음이다. 말로 죽이려는 자들이나 말에 당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나 말의 위력을 인정한다. 말은 생각을 반영한다는 통념 앞엔 장사가 없다. 말 한 마디가 인격 전체를 대변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조심한다. 바르고 고운 말로 상대를 때려눕힌다. 상대의 입에서 삿되고 거친 말이 나오도록 정중하게 깐죽거린다. 진실이 무엇이든 승패만 결정되면 그만이다.
절친한 사이일 경우 어린 남자들이 서로를 부르는 지시대명사는 욕이다. 오고가는 문자는 ‘×새끼’인데 이상하게 정이 쌓인다. 맞춤법에 너그럽고 발언의 자구나 배경에 무감하다. 그들의 대화는 권력을 계산하지 않는다. 철이 들면서 체면을 함께 들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자리가 잦아진다. 자꾸 내막을 깔고 속셈을 끼운다. 이런저런 색깔의 물감을 섞다보면 끝내 검은색이 되는 법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비슷한데, 다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자신의 해법이 정답이라고 난리다. 어투는 반듯한데 재미가 없고, 논리는 치밀한데 감동이 없다. 선사들이 차를 권하는 이유는 매사 이런 식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녹차의 최대 효능은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선문답하고 앉았네!’ 선문답은 사회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단어다. 대답이 무책임하거나 뜬구름을 잡을 때 주로 활용된다. 구설수에 오른 유력인사가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으면, 언론이 득달같이 가져다 쓰는 관용어가 돼버렸다. 물론 선사들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진리에 관한 물음 앞에선 십중팔구 딴청 아니면 딴소리니까. 도(道)를 모르는데 모른다고 실토하기 멋쩍어서? 일리는 있다. 도에 관한 앎은 생각일 뿐이며, 도에 관한 설명은 말일 뿐이다. 바람이라는 언어와 바람에 관한 사유가 바람은 아니듯이.
삶이 불행한 이유는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낱말과 개념에 얽매이면 행복에 종속된다. 실체도 없는 행복을 수치화하려 애쓰며 ‘적은’ 행복에 실망하고 ‘많은’ 행복을 부러워한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삶이 나를 산다. 생각이 나를 부리고 말이 나를 조종한다. 우열(優劣)에 고심하고 미추(美醜)에 골치를 썩는다. 이런 개인들이 모인 사회엔 대개 고시원과 연예인이 많다. ‘진리’가 진리는 아니며 극락은 ‘극락’에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명함을 받으면 설렌다. 민망한 마음에 솟아나는 뜰 앞의 잣나무. 누가 봐 주든 안 봐 주든 무신경한 뜰 앞의 잣나무. 바람결에 혼자서 낄낄대는 뜰 앞의 잣나무. ‘정해진 길은 없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있을 뿐.’ 아무렇게나 자라는 뜰 앞의 잣나무. 베면 베이는 뜰 앞의 잣나무. 하늘을 쥐고 흔드는 뜰 앞의 잣나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어따 대고 삿대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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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ː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불교신문에 기자로 입사해 현재 편집국 종단신행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전국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인문학 에세이 『길 위의 절』,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에 대해 기술한 『공부하지 마라 - 선사들의 공부법』, 44인의 조계종 고승들과 대담한 내용을 엮은 『그냥, 살라』,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한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