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독경이나 참선만큼 중요한 비폭력 운동

내 마음의 법구

2010-06-07     박노자

불경에 대해, 감로(甘露) 즉 ‘마음을 적시는 단 이슬’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아함부’에 포함돼 있는 초기 불경들이야말로 ‘단 이슬’로 느껴진다. 화려하고 신화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후기 대승 경전보다는 중생들의 절실한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 형식으로 돼 있는 초기 경전들은 훨씬 더 마음에 쉽게 와닿는다. 『아함경』의 방대한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잡아함경』 권32, 『전투활경(戰鬪活經)』을 자주 보고 또 본다. 구미 불자 사이에서는 불교적 비폭력 논리의 주된 근거라고 자못 잘 알려져 있다.

이 짧은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과 전사(戰士)들 마을 촌장 사이의 문답으로 이루어진다. 고금동서의 직업군인들이 다 그렇듯이, 이 전사들 마을의 촌장도 ‘적을 무찌른다’는 것이 종교적으로도 정당한 행위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러기에 ‘확인 차원’에서, 전투에서 적을 잘 무찌르면 아수라들과 싸우다 죽은 하늘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과 같은 좋은 곳에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적군 살해는 악업이 아니라 선업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이 군인에게 부처님이 바로 설법을 한다.

“(전사가) 수단과 방편을 다하여 원수인 적을 잘 무찌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상해(傷害)하려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 저들을 결박하고 칼을 씌워 찔러 죽이려는 마음을 어찌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촌장이 이 말씀에 수긍을 표하자, 부처님이 “살인의 악업을 지은 자가 좋은 곳에 태어날 리가 없다.”고 못박고,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종교적 전쟁 옹호론을 퍼뜨린 이들이야말로 지옥이나 축생도에서 윤회했으리라고 덧붙였다.

결국, 이 경전에 의하면 전사들 마을의 촌장이 바로 발심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악업 짓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악인 참회’의 모티브는 인연을 잘못 타서 악한 직역을 갖게 돼 평생을 악업 속에서 보낸 한 중생의 진정한 개안(開眼)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한 내용은 사실 지극히 상식적이고 근기가 덜 성숙된 중생까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명분이 무엇이든간에 살인이란 중생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명분이 아주 좋은 경우에는 이 악한 마음을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겠다. 저 유명한 체게바라가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전투가 완료되자마자 의사의 본업으로 당장 돌아가 부상 당한 관군 병사들을 치료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부득불 폭력에 호소하게 된 의사(義士), 인인(仁人)의 최상급에 속하겠지만, 그도 탈영병들을 총살하는 등 ‘규율을 위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게바라 같은 ‘행동하는 양심’까지도 폭력의 악업을 완전히 멀리하지 못했는데, 국가의 벌을 두려워하거나 그 상을 탐하거나 그냥 타성적으로 복종하는 일반 군인의 임전(臨戰)의 마음가짐은 과연 어떻겠는가?

부처님의 묘법을 실천하자면 반전·비폭력 운동이야말로 독경이나 참선만큼이나 절실하다는 것은, 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기계처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짓는 악업만큼 그 과(果)가 안 좋은 악업도 없다. 불법을 듣고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음에도 그 인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동물만도 못한 기계로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폭력에 대한 거부를 실천할 만큼 무외(無畏)의 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불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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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본래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이지만 2001년 스승인 미하일 박 교수의 성을 따르고,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 ‘노자(露子)’를 붙여 한국인 ‘박노자’로 귀화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동아시아학 및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 『당신들의 대한민국 1, 2』, 『하얀 가면의 제국』, 『박노자의 만감일기』,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