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와 농사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10-06-04     관리자
봄이 깊어가는 지리산의 산기슭과 들판에는 나물이 지천이다. 사계절 내내 길은 검고 건물은 똑같은 색으로 우중충하게 서 있는 도시와 달리 시골은 계절 따라 온 천지가 옷을 새로 갈아입는다.
이른 봄 냉이를 시작으로 꽃다지, 돌나물, 머위, 햇닢, 취나물, 고들빼기, 미나리, 씀바귀, 참나물, 고사리, 다래순, 개발딱지, 비비추, 두릅, 개두릅, 참죽 등등 그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물이 절 주변 들판과 밭에 고개를 내민다. 어디 나물뿐이랴. 별꽃, 쇠별꽃, 광대나물, 봄맞이, 민들레 등 작은 풀꽃에서부터 산수유,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앵두, 생강나무, 벚꽃, 복숭아, 사과, 배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화려한 꽃이 산천을 울긋불긋 물들인다. 매화 꽃봉오리 두어 개를 찻잔에 띄우면 가득히 풍겨 나오는 봄의 향기, 그렇게 온 산천은 긴 겨울이 지났음을 한 바탕 빛과 향기와 맛의 잔치로 축하해낸다.
잡화엄식(雜花嚴飾), 온갖 꽃들로 장엄한 화엄도량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룸비니 동산이 이러했을까? 봄 햇살이 난연한 오후에 화엄도량을 거니는 것은 시골 살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호사임에 틀림없다. 세상 논리로는 도시의 삶이 좋다고 하지만, 도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틈만 나면 떠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것으로 보아 도시의 삶을 권장하는 것은 거품이 많이 끼어 있는 듯하다.

.. 세상에 권장할 만한 두 가지 일..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주머니 하나 챙겨서 텃밭으로 나섰다. 대중 스님들에게 봄나물을 공양할 참으로 바삐 손을 놀리는 중에, 올해 승가대학에 입학한 청엄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전 암송대회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아 잠시 외출을 하게 되었단다.
우리 형제는 여섯인데 모두 남자다. 청엄 스님은 그 중에서 막내 동생이다. 부처님 인연이 깊어서인지 절반인 세 명이 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식이 많다고 해도 한 아들, 한 아들 모두 곁에 두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에는 자식의 출가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10년을 더 넘기고 나서야 얼마 전에 어머니가 전화로 “이왕 스님이 되려면 염불하는 스님 하지 말고 법문하는 스님 하소.” 하고 말씀하신다. 자식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마침내 인정하고 축원해주는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가슴 한 곳이 저려온다. 이제 막 사미계를 받은 막내 동생의 출가를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시름으로 보내셔야 할런지.
요즘 생각으로 세상에 권장할 만한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출가해서 스님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가꾸고 기르는 농사이다. 출가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살아가겠다는 서약인데, 부처님의 정신은 한량없는 중생을 한량없는 지혜와 자비로 구제하려는 대비원력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출가와 농사는 모두 생명을 살리고 기르고 가꾸는 성스럽고 뜻있는 일이다.
그런데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속의 가족 인연을 부처님 가족 인연으로 크게 회향시켜주는 것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듯하다. 사랑이 깊은 탓이겠지만, 그러나 사랑한다면 자유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의 갖가지 틀에 얽매여 초라한 삶을 살게 하지 말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하늘처럼 넓은 마음으로 온 중생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야 이 시대에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들이 꼬리를 이어 출현하지 않겠는가.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님들은 이 시대 우리 가족이 부처님 되는 장엄한 광경을 친견하리라고 마음을 내어 자녀가 출가할만한 인연이 있는지, 그 인연을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지를 한 번 짚어보면 좋겠다.

..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길러내는 일..
“고은이는 어른 되면 뭐 하고 싶어?”
며칠 전, 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고은이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절에 다니러 왔다.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어린이법회에 나왔던 고은이는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님 덕분에 전주로 갔다.
“외교관이요.”
“외교관이라, 제법 멋지네. 외교관 되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거야?”
난 중학교 때 뭐가 되리란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생 고은이가 벌써 외교관이라는 목표를 정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견했다. 그렇지만 외교관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고은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혹시 농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자식은 자신들과 다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도시 유학을 시키고 있는데, 농부의 삶은 어떠냐고 물은 것이다.
“농사는 싫어요.”
같이 앉아있는 부모의 낯빛이 복잡해지는 것은 자신들이 농부라는 것과 자식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은아, 세상에 많고 많은 일들이 있지만,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일이겠지. 바로 농사가 그래. 그래서 옛날부터 농사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했어.”
순간 부모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한때는 천하의 으뜸가는 일이었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 농업이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기에 농사의 가치 또한 절대적인 것이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선생의 표현대로 인류가 ‘거대 자살 체계’를 구축한 시대에,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단순 소박한 삶이 실낱 같은 희망이라고 한다. 출가와 농사, 겉보기에는 이질적이고 이 사회의 성공 논리로 보자면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진정 희망일 수 있는 것은 생명을 보듬어 살리는 몸짓과 마음씀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을 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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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묵 스님 ː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2000년 출가하여,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연구과정(화림원)에서 연구원으로 공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