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인류의 새벽으로 다가오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부처님의 참모습

2010-05-26     관리자
정반왕의 가계(家系)와 결혼문화

붓다의 부친인 정반왕은 사자협왕의 장자로, 아래로 세 동생 백반·곡반·감로반을 두고 있다. 이 네 형제는 또 다시 각기 두 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이러한 석가족의 가계를 흔히 ‘4남(男) 8자(子)’라고 칭한다. 이 중 붓다는 8자의 첫째이다. 이하의 사촌동생들 중에는 후일 불교교단에 출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붓다의 모후인 마야부인은 석가족과 이웃한 콜리족의 공주로, 동생인 대애도와 함께 정반왕에게 시집을 왔다.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은 고대사회의 결혼 풍습 중 하나이다. 이러한 측면은 중국에서도 발견되는데, 요 임금이 자신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순 임금에게 시집보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결혼과 관련해서 오늘날은 일부일처제가 당연시되고 있지만, 이러한 보편화는 사회가 산업화라는 유사한 모식을 확보한 뒤에나 가능하게 되는 문화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부인을 넷까지 둘 수 있도록 했다. 언뜻 보면, 남녀가 대단히 불평등해 보이지만 당시는 전쟁이 빈번해서 남성의 수가 여성에 비해 매우 적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성비를 고려하여 이러한 규정을 만든 것이니, 당시의 상황에서는 평등의 교시였다고 할 수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티벳은 무척 척박하기 때문에 유목과 농업이 섞여 있는 삶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남자 형제가 동시에 한 여성에게 장가들어 교대로 유목과 농업을 번갈아가며 생활한다. 역시 환경에 의해서 일처다부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문화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잃게 될 경우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이로 인하여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가서 형의 식솔들을 거두는 문화가 파생하고 있다. 이러한 유풍은 유목계열인 고구려나 고려에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결혼제도는 배경문화의 조건에 입각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옳다거나 그르다는 관점보다는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열린 시각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인도는 대륙 같은 광활한 면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혼문화가 하나로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시에 여러 결혼방식이 살펴지는데,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 중 하나가 모계풍습이다. 후일 붓다의 10대제자 중 사리자(舍利子)나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와 같은 분들은 공히 ‘~의 아들(子)’이라는 의미로 모계의 유풍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붓다의 잉태시기와 사촌들
붓다의 생애를 다루는 기록들에는 정반왕이 늦은 나이에 붓다를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붓다의 탄생을 석가족의 열망과 결부시키기 위한 의도된 허구이다. 붓다와 같은 경우는 대애도 소생의 이복형제인 난타나 다른 사촌동생들에 비해서 나이가 많다. 이는 붓다가 성도 후 귀향했을 무렵 사촌들이 결혼 정년기 전후의 나이였다는 것을 통해서 단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붓다의 사촌동생들을 나이순으로 배열하면, ② 제사 → ③ 마하남 → ④ 난타 → ⑤ 발제 = 아나율 → ⑥ 제바달다 → ⑦ 아난이 된다.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붓다의 35세 성도와 6년 뒤의 귀향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때에도 난타부터는 모두 미혼이었으므로 제사도 20대 중반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붓다는 다른 사촌들에 비해서 월등한 나이 차이를 가지고 있는 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붓다가 정반왕의 늦은 자식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준다.
붓다의 사촌들 중 제사는 정반왕을 이어서 석가족의 라자(raja, 왕)가 되는 인물이며, 이는 발제를 거쳐 마하남으로 계승된다. 마하남은 붓다의 만년에 코살라국의 비유리왕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될 때까지 석가족의 라자였으니, 재위기간이 무척 길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와 아나율, 그리고 제바달다와 아난은 공히 붓다께서 성도 후 고향을 방문하신 시점에 출가하여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된다. 이 중 발제는 당시 석가족 라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하여 붓다께 칭찬을 듣는 인물이고, 아나율은 10대 제자 중 천안제일이 되는 분이다. 그리고 아난은 25년간 붓다를 모시면서 8만 법장을 전수받은 시자이고, 제바달다는 악견(惡見)에 빠져 교단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낸 인물이다. 또한 난타는 이들보다 조금 늦게 붓다에 의해 다소 강압적으로 출가하게 되지만, 마침내 수행의 기쁨을 알게 되는 분이다.

룸비니의 탄생
강릉 오죽헌에 가면 몽룡실(夢龍室)이 있다. 몽룡실은 율곡이 잉태되던 날 사임당이 꿈에 용을 보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붓다 역시 육아백상(六牙白象)의 태몽을 가지고 있다. 용이나 육아백상이나 둘 다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동물은 아니나, 이들의 인생에는 이러한 상징적 동물들의 탁월성을 능가하는 위대함이 서려있다.
율곡은 태몽이 있었던 그 몽룡실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붓다는 당시의 해산 풍습에 의해서 마야부인이 친정으로 가는 도중의 룸비니라는 동산에서 탄생하게 된다. 피는 잠재의식적으로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금기시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어린아이의 싸움에서 코피는 패배를 의미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관념이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출산이 피를 동반하며, 이는 잘못될 경우 산모나 아이의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이 출산을 꺼려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출산은 금기시되어 직접적인 관련자들만 볼 수 있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금줄 등에 의해 격리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금기는 인류의 보편적 인식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출산에 임박해서 수레나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의 길이 평평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가마가 이족 보행을 하는 인간에 의한 운송수단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진폭이 커서 멀미가 심하다는 점은 만삭의 산모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측면이 결국 붓다가 콜리성의 중간지점인 룸비니에서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난산의 결과로 결국 마야부인은 붓다를 출산하고 난 7일 후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탄생과 관련된 배경의 상징
룸비니에서의 붓다 탄생은 북전(北傳)에 의하면 4월 8일이라고 한다. 이는 오늘날 중국불교권에서 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지정하고 있는 근거가 된다. 4와 4의 배수와 관련된 측면들은 붓다의 생애와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4와 4의 배수가 불교적으로 ‘완전함’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붓다는 가계로는 4남 8자 중 8자의 첫째로, 4월 8일에 32상과 80종호를 겸비하고 탄생하신다. 그리고 2월 8일에 출가하여 12월 8일에 성도하셔서 1장 6척의 키로 16대국을 80년간 편력하시며, 4성제 8정도와 12연기설을 주축으로 하는 8만 4천 법장의 12부경을 설하시고는 열반하신다. 그로 인하여 8섬 4말의 사리가 남게 되었는데, 이를 8국의 국왕들이 나누어 근본8탑을 조성하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붓다의 생애는 총체적으로 4와 4의 배수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러한 기록들이 역사적인 사실적 측면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상징성의 입장에서 ‘완전한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케 한다.
또한 붓다는 마야부인을 위해 임시로 시설된 산실에서 무우수(無憂樹), 즉 근심이 없는 나뭇가지를 잡자 오른 옆구리로 태어나셨다고 한다. 무우수의 등장은 붓다의 탄생에는 해산의 고통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이다. 또한 오른 옆구리로 탄생했다는 것은 인도의 오른쪽을 숭상하는 문화와 신분계급적인 측면에서 붓다가 왕족계급임을 나타내고 있는 측면이다.
인도문화 중에서 오른쪽을 숭상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데, 이는 중국문화에서는 반대로 왼쪽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오른손과 왼손이 밥 먹는 손과 뒷일을 처리하는 손으로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로 인하여 인사할 때는 오른손을 내밀어 보이고, 예경을 할 때도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다. 또한 수인(手印)과 관련해서 선정인이나 지권인을 취할 때, 오른손이 왼손의 위로 간다. 이는 붓다가 탄생했을 때, 양손으로 각기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위존(天上天下 唯我爲尊)”이라고 외쳤다는 것에서도 역시 오른손이 하늘을 가리키는 손이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좌측을 높게 보기 때문에 이와 반대의 양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한자로는 좌우라는 표현을 쓰고, 이를 풀어 쓸 때는 오른쪽, 왼쪽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좌측을 우선시하는 중국문화와 우측을 우선하는 인도부터 유럽까지의 문화적 충돌에 의한 혼란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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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스님 ː 철학박사(율장) 및 문학박사(불교건축). 동국대 철학과 및 불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및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고려대 철학과 박사 수료하였다. 약 50여 편의 논저서가 있으며, 현재 월정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으로서 동국대, 울산대, 성균관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