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고양이로다

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

2010-04-06     관리자
아깽이와 나

흰점박이 고양이는 아무 흔적이 없어서 그저 던져놓기만 해도 사람들이 겁낸다.
뛰다가 몸을 뒤집다가 이리저리 날뛰면서 난리를 친다. 냉철히 살펴보니 그것이 곧 화두였다.
- 『나호야록(羅湖野錄)』


음독자살한 시인 이장희(1900~1929)는 ‘봄은 고양이로다’라는 한 편의 시로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양이의 털에서 고운 봄을, 고양이의 눈에서 미친 봄을, 고양이의 입술에서 포근한 봄을, 고양이의 수염에서 푸른 봄을 봤다. 공감한다. 1월 27일 현재. 전형적인 삼한사온 속에서 봄은 아직 멀다. 하지만 집안에서 뛰어노는 춘기(春氣) 덕분에 동장군에 대한 시름을 던다. 물론 보일러의 은덕도 빼놓을 수 없지만.
고양이를 키운 지 6년이 넘었다. 아내는 ‘유리’, 나는 주로 ‘아깽이’라고 부른다. 아기고양이의 준말이다. 인터넷거래를 통해 분양받은 터키쉬앙고라. 새하얗고 기다란 털이 온몸을 수북이 덮었다. 분홍색 콧날이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게 몽그라졌다. 이제는 현관 밖 발걸음 소리에서 타인과 나를 식별할 줄 알고, 내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으면 금세 머리맡으로 달려와 자리를 까는 지간까지 발전했다. 아깽이의 예상 수명은 앞으로 절반이 남았다.
고양이의 일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식사, 수면 그리고 관찰. 뭐가 그리 궁금하고 의뭉스러운지 설원에 박힌 사파이어 같은 눈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탐한다. ‘몸을 뒤집거나 이리저리 날뛰는’ 동작의 원인은 대부분 호기심 때문이다. 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는 모름지기 간화선(看話禪)을 하려면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두를 공부하면 반드시 생사의 이치를 꿰뚫으리란 믿음’, ‘기필코 깨달아 더럽고 치사한 중생의 마음과 이별하겠다는 오기’, ‘언어 너머의 진실, 삼라만상과 세상만사의 이면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을 각각 가리킨다. 아깽이의 삶에 이를 대입할 경우 대의심과 대분심에 관해선 예시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의심은 앞서 설명한 대로고, 장난감 쥐를 늦어도 이틀 안에 형체도 없이 찢어놓는 투지에서 대분심을 읽는다. ‘고양이가 쥐 잡듯 수행하라’는 고칙(古則)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만 대신심을 논할 때에는 말문이 막힌다. 아깽이도 깨달음을 생각할까, 고양이도 깨닫고 싶어 할까. 모르겠다. 깨달음이란 담론은 인간의 전유물이다. 부처님의 말씀 역시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게 가공됐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깽이와 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생각도 헤아릴 길이 없다. 하기야 언어로 생각을 파악하는 일조차 그리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살인의 내용은 알 수 있어도 살인의 마음은 알 수 없다. ‘빚 독촉에 시달려서’ 혹은 ‘다른 남자와 자서’ 따위의 신문기사? 단순히 ‘분노’라는 단어로 인생 최악의 결단을 설명할 수 있을까. 피의자의 짤막한 진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건 형벌의 무게이지 마음의 역사는 아니다. 아울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손 그건 감형을 바란 변명일 뿐 마음에 관한 직보(直報)일 수 없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여는 순간 생각은 이미 다음 생각으로 갈아탄 뒤니까. 말이 일단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십중팔구 몸 밖의 세계만 변화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내면엔 입이 없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하간 오랜 세월 지켜봐온 아깽이의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이런 대답이 아깽이답다. ‘깨달음은 개뿔! 먹을 수 없고 가지고 놀 수 없다면 사절이야. 생선통조림이나 맛나고 비싼 걸로 한번 내놔봐.’ 그에겐 눈앞의 먹이가 목적이요 발밑의 잠자리가 행복이다. 길게 보지 않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야가 좁고 사유가 적으니 편견이 좁고 번뇌가 적다. 머리로 먹고사는 인간들에 자주 실망하다보니 몸으로 먹고사는 짐승들에 유난히 정이 간다.

고양이를 부탁해

조주는 아무 말 않은 채 짚신을 머리에 이고 방을 나갔다. 남전이 말했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새끼를 구했을 텐데.”
- 『종용록(從容錄)』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안다. 거리에 떠돌이 개보다 떠돌이 고양이가 더 많아졌다는 걸. 암고양이는 한 번에 예닐곱 마리씩 출산하며, 두 달 만에 한 번씩 임신이 가능하다. 작심하고 씨를 받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우후죽순이다. 고양이의 범람은 애완묘의 증가에 비례한 유기묘(遺棄猫)의 증가와도 관련이 깊다. 늙고 병들어 ‘애완’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자, 비정한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경우를 말한다. 유기묘가 낳은 고양이는 다시 유기묘가 된다. 음식물쓰레기로 연명하며 공원 한구석에서 잠을 청하는 유기묘들의 수명은 2년 남짓이다. 고양이의 두뇌가 영화 ‘새’나 ‘혹성탈출’을 봐도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하게 생겨먹은 건 일견 다행이다.
집단행동이 우려되니까. 고양이 특유의 야성에 인간에 대한 배신감까지 겹치면, 노약자 연쇄살인이나 쓰레기 분리수거제 와해 따위의 사회문제는 충분히 유발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고양이의 천성을 고려하면 걱정을 붙들어 매도 좋다. 기본적으로 독존(獨存)을 즐기니까. 게다가 생태계에 대한 예의까지. 자기들끼리 물어죽이며 적정한 개체수를 유지한다.
고양이는 훈련이 불가능한 동물이다. 동일한 종끼리도 ‘내외’가 철저한데 하물며 인간에게 고분고분할까. 고양이를 분양받았다면 ‘양육한다’가 아니라 ‘동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한다. 속 터져 죽고 싶지 않으면 그게 상책이다. 애당초 소유가 불가능한 짐승을 서로 갖겠다고 옥신각신 난리를 쳤으니 ‘남전참묘(南泉斬猫)’와 같은 사단이 나는 거다.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 간에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다툼이 계속되자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가 중재에 나섰다. 점잖게 달래고 합법적으로 으르는 식의 일반적 중재는 취향이 아니었던 듯. 별안간 고양이를 집어 치켜들더니 다짜고짜 협박이다. “누구든 바로 한 마디 이르면 베지 않겠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남전은 기어이 일을 냈다. 칼을 들어 고양이를 두 동강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훗날 남전은 조주종심(趙州從픹) 선사에게 그날의 끔찍한 참변을 소개하며 똑같이 물었다. 묵묵부답하던 조주는 얼른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는 나가버렸다. 가장 살벌하고 까다로운 선문답 가운데 하나다.
남전이 실제로 고양이를 죽였는지는 확증할 수 없다. 문답을 한결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방을 나간 행위에 대한 남전의 칭찬과 참회가 어이없다. 그게 바로 자기가 원하던 해답이란 건데, 논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불합리하다. 곧 ‘문학적으로’ 풀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동당과 서당은 으레 주지나 방장과 같은 현직에서 물러난 원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오래고 깊은 수행으로 명성이 난 스님이 사는 곳이니 드나드는 제자도 많을 게고, 곧 일가견을 이룬 문중을 상징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매한 스님들이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으르렁대지는 않았을 게다. 절 안의 패권 또는 인사를 둘러싼 이해관계 아니면 제법 묵직한 공양미나 값나가는 시주물에 대한 은유로도 여겨진다. 남전의 칼부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무소유를 실천한다고 떠드는 녀석들이 물건과 자리에 연연하다니.

남전을 위한 변명

세상은 본래 일삼을 것이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흔들렸을 뿐이다.
이를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나 옳다 그르다 싫다 좋다 따지지 말아야 한다.
- 『동어서화(東語西話)』

이번엔 불성론(佛性論)에 따른 뜻풀이. 『종용록』의 원문 뒤에 붙은 평창(評唱)이 모순을 풀어낼 실마리를 살짝 제공한다. ‘그대들이 숟가락을 잡고 젓가락을 놀리는 동작에서 눈치 챌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벤 일과 짚신을 머리에 이고 간 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도리를 쉽게 알 것이다.’ 서울에서 구두 고쳐 먹고사는 김씨와 뉴욕에서 공무원 생활하는 존슨처럼 전혀 딴판인 관계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동격이라는 것이다. 숟가락을 잡고 젓가락을 놀리는 동작은 무감하게 벌이는 일상사다. 본능이고 무심이다. 고양이를 베는 일이나 짚신을 머리에 이는 일이나 마음에 생각과 판단을 섞지 않는다면, 똑같이 무색무취한 현실이다.
언어로 분별하지 않고 관습으로 예단하지 않고 업식(業識)으로 지레짐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해석은 어떨까. 고양이를 서로 갖겠다고 설치는 일은, 짚신을 발에 신지 않고 머리에 이는 바보짓과 다를 바 없다는 것.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존슨은 존슨대로 그냥 놔둬라. 헛된 명리에 집착하며 자존심 팔지 마라. 그건 너의 이름과 형상일 뿐, 너는 아니다. 운운. 스스로가 부처임을 망각하고 허튼 수작 말라는 경고.
선사들은 자신의 생명조차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육체는 똥과 오줌, 눈물과 침, 코딱지와 비듬, 각질과 피지를 잔뜩 짊어진 가죽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위법망구(爲法忘軀)를 장난처럼 즐겼다. 아끼던 수좌(首座)가 깨달음을 증명하겠다고 앉은 채로 죽어버리자,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그게 대수냐’며 손가락질하던 당말(唐末)의 구봉도건(九峰道虔) 선사가 예다. 나병에 걸린 여인과 한 방에서 며칠 밤낮을 지낸 구한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의 일화 역시 유명하다. 단순해서 용감했고 무식해서 깨끗했다.
만약 고양이를 정말 죽였다면 사정이 달라질까. 남전을 희대의 파계승이라 욕하면서 수갑을 채우고 곤장을 치는 게 능사일까. 연기(緣起).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것은 언젠가 끝장을 보기 마련이다. 비교적 빠른 파멸과 비교적 늦은 파멸, 조용한 파멸과 조금 시끄러운 파멸이 있을 뿐이다. 물질적 현상이든 정신적 관념이든 마찬가지다. 윤리는 세상의 온당을 위해 반드시 존중돼야 할 가치다. 죄를 물어야 하고 벌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연기론에 입각하면 죄를 추궁할 수 없다. 죄의 실체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살인을 했다손 살인이란 현상은 살인하는 순간에만 국한된다. ‘잔인한 죄악’이라는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했을 때 살인은 삶 속에서 일어난 특정한 행위에 불과하다. 살인자를 옥에 가두고 교수대에 세운다 해도, 그것은 지나간 사실을 의미론적으로 소급해 적용한 결과다. 단죄는 죽은 자의 억울함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필요하다. 다만 도덕의 범주에서나 유효할 뿐이다. 진실의 범주에서 죄는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패륜아를 용서할 수 있고 연쇄살인마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남전을 위한, 약간은 위험한 변명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쯤에서 말을 삼가게 된다.

남전은 본래 남천(南泉)이라 써야 하는데 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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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ː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불교신문에 기자로 입사해 현재 편집국 종단신행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전국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인문학 에세이 『길 위의 절』,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에 대해 기술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44인의 조계종 고승들과 대담한 내용을 엮은 『그냥, 살라』,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한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