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佛母)의 원력

남지심 연작소설

2007-06-10     관리자

  진불화 보살과 약속한 다방으로 가려고 집을 나서던 강 여사는 마루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를 쳐다봤다. 시계는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요즈음은 거리마다 차가 밀리기 때문에 약속시간보다는 일찍 집을 나서야 하지만 아무래도 30.40분 정도는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머리나 잘라야 겠다고 생각하며 미장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날씨가 더워지자 조금 자란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였다. 

미장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강 여사는 자신의 가방을 다시한번 점검 해 보았다. 가방속에는 10만원짜리 수표 3장이 들어있는 흰봉투가 얌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봉투를 바라보고 있는 강 여사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3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석달동안 생활비를 쪼개고 또 쪼개고 했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막 잎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인 이른 봄날 절에 같이 다니는 진불화 보살이 강 여사를 찾아왔다.  그녀는 이런저런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다가 "  향욱 스님이 3천불 봉안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보살님도 동참을 좀 해주세요 " 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향욱 스님은 진불화 보살님의 속가 동생인데 속연보다는 불연이 더 수승했던지 진불화 보살은 향욱 스님을 스님으로 깍듯이 모실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존경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 동참금이 얼만데요 ? " 강 여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 부처님 한분을 모시는데 동참금이 30만원 이래요 " 했다. 

30만원이라는 금액은 생활을 하고 있는 주부 입장에선 결코 작은 돈이라고 할 수 없지만 세상에 부처임을 나투시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도 동참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진불화 보살의 청을 쾌히 들어 주었다.  그러고 난 강 여사는 생활비에서 한달에 10만원씩 저축하기로 하고 생활비 지출 명세서를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10만원을 떼어낼 만큼 허술하게 비어있는 곳이 없었다. 강 여사는 할 수 없이 문화비란 명목으로 책정돼 있는 10만원을 몽땅 저축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달서 부터 3개월 동안 10만원씩을 모아 30만원을 만들었다. 하기 때문에 가방속에 들어있는 30만원의 의미는 각별했다. 

미장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반바지에 흰티를 입은 아가씨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 어서 오세요 " 스물 두서너살쯤 되었을까 ? 갸름한 얼굴에 웃는 얼굴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 머리를 좀 자르려고 하는데요 . " "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 아가씨는 의자를 끌어당겨서 강여사가 앉기 편하게 고정시켜 주고는 까운을 내려 강 여사 어깨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자른 머리카락이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까운깃을 잘 조여주고 어깨 위에 덮개를 얹어 까운을 눌러 주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그녀 손길엔 정성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강 여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머리를 아가씨한테 맡기고 실내를 둘러 보았다. 의자가 두개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미용실이지만 벽에는 예쁜 머리의 미녀들 사진이 적절하게 배치돼 있고 장식용 목각과 화분이 구석구석을 오밀조밀하게 메우고 있어서 퍽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 사모님 심심하신데 책 보세요 " 가위를 들고 머리칼을 자르려고 하던 아가씨는 여성지를 집어서 강 여사 무릎위에 놓았다.  " 고마워요 ."  강 여사는 여성지를 받아서 목차를 훑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아우성 소리같기도 하고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 여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 기도 시간인가 봐요."  아가씨가 가위로 머르를 자르며 강여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군요. "  강여사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길거리를 지날 때 빌딩안에 있는 교회에서 들려오는 목사님의 설교 소리나 찬송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신도들의 기도소리를 이렇게 가깝게 들어보긴 처음이었다.  " 사모님은 교회에 안다니시는가 보죠 ? "  아가씨가 자른 머리를 이리저리 맞춰보며 물었다. " 네, 안나가요. 아가씨는요 ? " " 저도에요. 저희 집에선 큰 언니만 교회에 나가요 . " " 그래요. "  " 큰언니를 보면서 느끼는 건데요. 종교를 갖는건 어쩌면 외로움 때문인 것 같아요 . "  "..."  강여서는 의외의 말을 하고 있는 아가씨를거울 속으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형부가 돌아가시고 반년 동안은 외로움 때문에 못견뎌 하더니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더군요, 요즈음은 완전히 광신도가 됐어요. " 아가씨가 조금 전처럼 자른 머리를 다시 요리저리 맞춰보며 말했다.  " 아가씨는 외롭지 않은가 보군요. 교회에 안나가는 걸 보니 " 강 여사는거울 속의 아가씨를 바라보며 웃었다. " 그럴 리가 있나요. 저도 가끔은 외로워요. " 아가씨는거울 속의 강 여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보기엔 아가씨는 별로 외롭지 않을 것 같은데 ... 예쁜 공간 만들어 놓고 열심히 일하고 손님들하고도 재미있는 시간 가지고 ..."  " 그건 그래요 . 하지만 손님 때문에 더 외로워 질 때도 있어요. " " 그건 어떤 땐데요 ? "  "여대생 머리 만져 줄때요 . 머리 모양을 거울 속에 비춰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대생을 보고 있으면 그 여대생이 부러워지면서 저도 모르게 쓸쓸해져요. 그럴 때는 저 자신이 몸시 외롭게 느껴져요. " 아가씨는 다시 자른 머리를 요리저리 들여다 보며 속엣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강 여사는 잠자코 아가씨 말을 들으며 거울 속에 비치는 아가씨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물 두 서너살쯤 되었을까 ? 학교를 다닌다면 지금 대햑교 2. 3학년 정도  되었을 것 같았다. 강 여사는거울 속에 비치는 아가씨 모습을 바라보면서 묘한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슴아프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장원에 머리를 손질하러 왔던 여대생은 자신이 미장원 아가씨를 쓸쓸하고 외롭게 했다고는 전혀 생각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어쩌면 하루에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자 어떤 전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권력이 됐던 명예가 됐던 부가됐던 지식이 됐던 건강이 됐던 재능이 됐던 행복이 됐던.... 아무튼 다른 사람이 부러움을 살 만큼 무엇인가를 누리고 소유하지 못한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 여사는 자기 자신을 한번 냉정하게 돌이켜 보았다. 자기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부끄럽고 미안해 할 만큼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히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야 말로 정말로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하에 있는 교회에서는 여전히 아우성치듯 울부짖듯 하는 기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강 여사는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 저 사람들도 자신이 받은 상처를위로 받고 보상받고 싶어서 저러는게 아닐까 " '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서는 강 여사가 매일 만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출할 때 대문을 닫고 나오는 자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세를 살고 있는 아주머니도 있을 지 모르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보았을 부인도 있었을 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무소유를 강조하신 것은 탐착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오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도 있으셨던 것 같다. 상처는 단순한 상처를 끝나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이 인(因)이 되어 예측할 수 없는 과(果)를 불러 올 수도 있으므로 살인자가 살인을 하기까지에는 누군가가 그의 가슴에 증오의 씨앗을 심어 놨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이기적인 행복 추구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강 여사는 보살로서의 대 서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가 더욱 확연하게 알아졌다. 

미장원 밖을 나온 강 여사는 상처 받아서 쓸쓸하고 외로워진 사람들 가슴속에 부처님 한분씩을 조성해 주고 싶은 간절한 염원이 가슴속에 차 올랐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준 지도 모르고 이기적 행복에 취해있는 사람들 가슴속에도 부처님 한 분씩을 조성해 주고 싶은 염원이 가슴 속을 채웠다.

세상 사람들 가슴을 법당 삼아 그 안에 부처님 한 분씩을 조성해 줄 수 있다면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불모일 것 같았다.  세간적인 행복은 다른 사람들 가슴에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법력으로 얻어진 행복은 다른 사람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니 이 일을 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일이 무엇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강 여사 가슴은 표현할 수 없는 설레임으로 자꾸 두근거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