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절제미를 만나다

선어유희(禪語遊戱)

2010-04-06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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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明月)은 암자를 비추고
암자는 명월을 담네.


일본 고베 선창사(禪昌寺)에 머물던 경안(慶安, 케이안) 스님이 당시에 주지이면서 동시에 그의 스승인 월암(月庵, 겟간) 선사 문집에 남긴 선시이다. 그는 650년 전 14세기 무렵에 부모, 중생, 국왕, 삼보의 4가지 은혜를 갚기 위해 경전을 모으려 다녔다. 동시대 같은 사찰에서 함께 살았던 무견(無見, 무켄)은 중국까지 들어가 일체경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중원에서 열반했다. 이 두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이후 고려와 중국 각지에서 출판된 경전을 모았고 부족한 것은 필사하여 추가하면서 일체경을 구비하기에 이르렀다.
선창사에는 월암 선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그 영정의 찬(撰)을 당신이 스스로 썼다고 전한다. 남의 손에 나의 평가를 맡길 수 없다는 결백증과 약간의 아만심 그리고 자신감이 겹쳐진 탓이다. 그려진 모습 속에서 선사다운 칼칼한 성품이 엿보였다. 따지고 보면 가끔 묘지문이나 제문을 자기 손으로 써놓고 시적(示寂)하는 선사들이 더러 있었으니, 자찬(自撰) 정도야 거기에 비한다면 사실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워낙 초서로 갈겨 쓴 탓에 해독력이 부족하여 의미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다소 유감이긴 했다.
그와 제자들이 애써 모은 그 일체경은 250년이 지난 1614년에 본산인 교토 남선사(南禪寺)로 옮겨지게 된다.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인하여 보다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절이 필요한 탓이었다. 고베(神戶)에서 교토(京都)까지는 배를 이용했고 이후 절까지는 수레를 이용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강화도에서 배를 이용하여 고령 개경포(開經浦)까지 왔다. 그리고 수레와 사람의 힘을 빌어 해인사까지 이운했다. 삼재(三災)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야 비로소 법보(法寶)를 보관할 터가 될 수 있는 것은 선창사나 해인사나 같은 도리라고 하겠다.
선창사와 남선사는 모두 임제종 남선사파에 속하는 사찰이었다. 명암영서(明庵榮西, 묘안에이사이, 1141~1215) 선사가 송나라에 유학한 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임제선을 전했다. 두 절 모두 절 이름 속에 있는 ‘선(禪)’이라는 글자를 포함시켜 선종사찰임을 보다 분명히 했다. 남선사 스님들은 검은 장삼에 오조가사를 하고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손에 모두 부채를 들었고 장삼 안으로는 흰 명주목도리를 받쳐 입었다. 송나라 때 선종 승려들이 저런 복식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조계종과 동일한 임제법손이 살고 있는 남선사였다. 특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고려대장경 초조본 1,7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선창사에서 옮겨온 일체경 속에 포함된 일부이다.
낮에 본 남선사 석정(石庭)은 정원 조경이 워낙 단출하여 일체 망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독특한 양식 때문인지 ‘믿거나 말거나’식의 야사가 함께 전해온다. 주군이 ‘두견새를 어떻게 울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고 대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인내심의 덕장(德將)이었다. 그는 부하들이 나뭇잎 떨어지는 걸 보며 혹여 고향 생각을 할까봐 주변 정원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직업상 성격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사무라이들인지라 그들의 정서순화를 위한 ‘맞춤 정원’이 필요했다. 그 결과 이런 정원이 탄생했다는 설이다.
남선사 ‘고산수(枯山水, 가레산스이) 정원’은 왕모래와 바위, 그리고 이끼만으로 정원을 꾸몄다. 정원석은 산이었고 모레는 바다였으며 이끼는 정원수였다. 선종의 융성에 따른 석정(石庭)과 같은 허식을 극도로 억제한 절제된 정원을 탄생시켰다. 선사상이 정원 축조의 의도에 강한 영향을 끼쳐 기존에 유행하던 물과 호수, 그리고 수목이 어우러진 화려한 회유식(回遊式) 정원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버린 절제미의 극치였다. 그야말로 선종 정원이었다. 마루 위에서 한참을 내려다보며 옛 선사들의 군더더기 없는 삶을 읽을 수 있었다.

희(噫)라! 일적해지정(一滴海之庭)이여
아! 한 방울의 물에서 바다까지 보는 정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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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ː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재정국장을 거쳐, 현재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써왔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와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