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부터의 도반

특집 우리 사이 좋은 사이

2007-06-10     관리자

오염된 환경과 혼탁한 욕망들로 헝클어져 가는 이 세상속에서 부처님의 진리 앞으로 다가가는 내 삶이 보다 고요하고 경건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향을 사른다.   천성이 맑은 사람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 또한 바로 보인다 하였는데 전생의 업이 두터웠던 탓인가, 내겐 그 무명의 시간이 너무 길고 고단하였다.   아직도 범속한 여인으로 그 허물을 다 벗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수행의 깊고 편안함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2년여 사이 부처님 법을 만나 오랜 시간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극복하지 못하던 독선과 자만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놓여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수행의 진전이 다소 느리다하여 좌절하거나 불법의 오묘한 진리앞에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연초에는 출가 전 남편이기도 하였던 아냐 로카 스님이 그 자신이 쌓아올린 반생의 삶을 마치 헌 넝마 벗어 버리듯 훌훌히 내던지고 테라바다 불교권의 한 사원의 승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어쩌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무한한 변수 속에서 노력하는 만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있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혹은 작가로 깨어 있고져 마치 삶을 탐색하듯 살아오던 그가 마침내 "삶은 오직 고통일 뿐 어떤 행위도 욕망 이상의 것은 아니다." 라고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색과 궤도 수정을 하였겠는가.

   "고정된 개체는 없다." 라는 이 불교적 용어가 그의 수년간 작업 명제였던 것을 기억하면 그에게 있어 출가란 결코 일시적 감정이나 이상에 젖은 만용이 아니라 진실로 무욕의 삶과 청정한 도에 이르기 위한 구도자의 목마른 갈구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전시회를 치루고 주변을 정리해 가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서운함이나 노여움보다는 진작 가야 했던 그 길을 후미지고 힘든 길로 돌아 이제야 가게 되는구나 하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한번도 남편을 위해 따스한 마음 한번 열어보이지 못한 아내였건만, 그 자신 출가를 통해 눈먼 아내에게 진리의 불을 밝혀주고 열하의 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부부 인연으로서가 아니라 승, 속의 계율을 따르는 승려의 신분으로 만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잡다한 현실에 발이 묶여 그처럼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없을지나 언제인가는 나 또한 가야 할 마지막 지향점 또한 수행자로서의 그 길뿐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행복하지 못하였던 결혼생활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질곡된 30대를 살아야 했던 어느 한 시절, 불행은 오직 그의 탓이라고 몰아 세웠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속가에 머물 때도 늘 비어있던 남편의 자리가 떠나고 나니 더 썰렁하였다.   결국 강한 척 당당하게 살아온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를 의지하고 살았음이 분명하였고 아직은 철없을 내 아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더러는 흔들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너무 멀어 불빛조차 희미하였지만 아비는 그 등불을 더 높이 더 멀리 비추기 위해 지금 잠시 우리곁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아이가 보챌 때마다 달래곤 하였다.

   강직한 어머니를 닮아 유독 부조리를 용서하지 못하던 비수 같은 정의감, 순수를 지향하던 그의 정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해 늘 가난하던 호주머니, 어찌할 수 없는 속성들로 고리지어 있는 이 사회속에서 예술 이외엔 그 어떤 일에도 무능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영혼을 가진 남편의 전생은 아마도 승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전생을 가진 사람이 불교와는 애당초 인연이 멀었던 나를 만나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이시대엔 무용지물이 되고만 고답적 격식과 비합리적인 관습에 얽매여 사는 전통유가의 구식교육권 속에서 성장한 나는 집안의 어떤 여인도 유고사 상권을 벗어나 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처럼 불교에 대해 무지하였던 내가 결혼하여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남달리 신심이 두터운 불교적 가풍의 시댁식구들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외며느리가 이왕이면 불심 깊은 사람이었으면 하던 시어머니의 내게 대한 실망은 거기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그때만 하여도 인연이 오지 않았던지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편견으로 닫힌 내 가슴의 문을 열지 못했다.

   더구나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현실적 뒷받침 없이 정신적 공감대만으로는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지 못했던 우리는 이상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올 일인 데도 그무렵은 왜 그다지도 심각하고 절박하게 우리의 결혼생활을 파행적으로 몰고가야 했던지 우울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결혼 2년만에 남편은 가마가 있는 산으로 거처를 옮겨 갔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도시에서의 흙작업이 불가한 특수한 여건 탓이라 하였지만 양보나 타협을 모르던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이란 허구성에 대히 심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십여 년 이상 지속된 별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나긴 별거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는 내면적 성숙을 키워 왔으며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그토록 방관시하던 불교의 진리에 두 사람 다 깊이 심취할 수 있는 동기를 맞이한 데 있다.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나는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하여 중도에 포기하였던 책을 다시 펼치고 30중반에 이르러서 대학의 한모퉁이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회의는 깊어만 갔고 유한한 시간 속에 속절없이 사라지고야 말 인간의 한계성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무렵 불교가 조금씩 설득력 있게 황폐한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남편 또한 오랜 시간 산 속에서의 은둔생활을 통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이 광활한 우주의 법칙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을 것이고, 동양적 사고를 지닌 그의 정서에 불교는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만약 그의 삶이 평탄하고 유복하였다면 여느 남성들처럼 아직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그 몫을 다하는데 신념을 바치고 살았을지 모르며 나 또한 여인의 속성을 요령있게 헤아릴 줄 아는 유능한(?) 남자를 만났던들 지금의 내 삶의 지향점은 일상적 욕구를 충족하는 범위 안에서 맴돌고 있을지 모근다.

   그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던 남편의 뜨거웠던 삶의 자락들이 위빠싸나 수행법을 중시하는 근본 불교를 만남으로 비로소 청정한 지혜를 얻게 되었으며 나 또한 그 남편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으니 남달리 고단하였던 우리의 인연은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허무한 사바세계의 모든 욕망과 집착을 끊기 위하여 용맹 정진하고 있을 아냐 로카 스님을 생각하며 불법 안에서 도반으로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해 본다.

김도희는 '52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성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지방 전문대학에서 [실내 디자인 이론] 과 [이미지 연출론] 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와 인연을 밎어 거해 스님이 지도하시는 [위빠싸나 선우회] 회원으로 수행정진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