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와 장엄] 부처님의 사리, 탑과 사리장엄구

불국토와 장엄

2010-01-29     유근자
▲ 그림1>> 부처님의 사리호, Piprawa 출토, 인도박물관

 

불국토와 장엄 불교미술은 장엄(莊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반열반 후 부처님의 사리는 탑이라는 장엄물에 의해 부처님의 무덤이자 예배의 대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탑 안에 봉안되는 부처님의 사리는 겹겹의 사리장엄구로 다시 장엄의 옷을 입었다.
장엄은 불국토가 아름답고 엄숙하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부처님이나 보살의 몸이 그 공덕에 의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이 봉안된 불전(佛殿)과 불탑은 불교의 이상세계를 현실의 가시적인 공간으로 재현하기 위해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신자들은 불교 세계의 이상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마찬가지다. 지붕은 기와로 장엄되고 건물 외벽과 내벽은 단청으로 채색되었다. 부처님은 법당 안 수미단 위에 안치되며 부처님의 머리 위는 또다른 집 즉 닫집으로 장엄되었다.
부처님의 모습은 어떤가. 32상 80종호로 장엄된 불신(佛身)은 장엄과 함께 상징성이 부여되었다. 머리 위에 솟아 오른 살상투와 두 눈썹 사이의 백호(白毫), 금빛나는 몸은 부처님의 상징이 되었다. 부처님의 광명은 몸에서 발산되는 빛으로 표현되고, 부처님이 앉는 자리는 연꽃이 피어올랐다. 이처럼 불교미술은 무엇 하나 장엄 아닌 것이 없다.
올 한 해 ‘불국토와 장엄’이라는 연재를 통해 사찰의 곳곳에서 접하는 성보(聖寶)들이 불국 정토를 표현하고 있는 장엄물이라는 관점에서 순례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금강경과 장엄
『금강경』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경전 가운데 하나다. 『금강경』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서 이야기하는 장엄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色]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 『금강반야바라밀경』(조계종출판사, 2009)

결국 『금강경』에서는 색장엄, 성장엄, 향장엄, 촉장엄, 법장엄 등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청정한 마음을 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장엄구
인도에 건립된 최초의 부처님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은 여덟 곳에 세워졌는데, 우리는 이것을 근본 8탑이라 부른다. 이 외에도 2기의 탑이 더 있었는데 사리를 담았던 병을 사리 대신 봉안한 병탑(甁塔)과 다비장의 재를 넣은 탄탑(炭塔)이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 반열반 후 인도에는 10기의 탑이 부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소카 왕은 기원전 3세기 경 인도에 8만4천 탑을 건립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인도를 통일한 후 불교에 귀의한 대표적인 전륜성왕이다. 이후 불교의 전파와 함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 역시 불교가 전해진 곳에 중요한 예배대상으로서 건립되었다.
불교도에게 부처님의 진신사리 친견은 가장 큰 바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필자는 2006년 2월 그 값진 기회를 한번 놓쳤다. 인도의 델리국립박물관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데, 당시 정보가 부족해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영국인 펩페(W. C. Peppe′)는 1898년 네팔 국경의 피프라와(Piprawa) 탑 터에서 ‘사까족의 부처님’이라는 명문이 있는 사리용기를 발견하였다(그림 1). 사리용기 안에서 발견된 뼛조각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의미하였다. 사리는 원래 부처님의 유골을 상징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 뼛조각이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로 여겨졌다. 바로 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현재 델리국립박물관 전시실에 황금으로 된 탑 안에 보관 중이고, 사리용기는 꼴까타의 인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의 포장, 불탑과 사리장엄구
불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바깥 사리용기라 할 수 있다(그림 2).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불탑은, 당대의 예술적 기량과 정성이 담긴 최첨단 포장이었다. 불탑 안의 사리는 또다시 돌 → 동(銅) → 은 → 금·수정·유리 등의 용기 안에 넣어졌다. 왜 이처럼 겹겹의 용기 안에 사리를 넣었을까?

 

 

▲ 그림2>> 송림사 대웅전과 5층 전탑, 경북 칠곡 송림사


여러 겹의 사리장엄구는 태아가 모태에 잉태된 이미지를 상징한다. 사리장엄구 중 가장 안쪽의 수정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원수(原水)를 의미하고, 금은 최초로 탄생하는 황금의 태아 이미지를 상징한다. 신라의 김알지가 알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상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사리장엄구는 탑 속에 안치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빈 절터에 남아있던 탑이 도굴꾼들의 주 표적이 된 후, 신앙의 대상에서 값나가는 물건으로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사리장엄구들은 각 박물관과 수집가들의 손으로 속속 들어갔다. 또한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탑 수리 역시 많은 사리장엄구들을 세상으로 내놓는 계기가 되었다.
송림사의 사리장엄구는 1959년 5층전탑을 해체수리 할 때 2층 탑신에서 발견되었는데, 8세기 초 통일신라의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거북이 모양의 돌로 된 함(그림 3-1) 속에는 금판을 오려서 만든 전륜성왕이 사는 화려한 궁전 모양을 본뜬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금으로 된 연꽃 위에 녹색 유리잔이 놓여 있고, 유리잔 안에는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그림 3-2).
금과 유리로 이루어진 송림사 사리장엄구는 태아가 잉태된 이미지를 신라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름진 얼굴의 어머니 대신 꽃가마 타고 시집왔을 새색시 어머니가 떠오르고, 꽃가마 타고 저승길 떠난 아버지의 장례식이 생각나는 것은 불국토를 상징한 송림사 사리장엄구의 금색과 초록색 때문일까.
송림사 사리구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깥에 노출된 사리장엄구들이 박물관 진열장이 아니라 원 위치인 탑 안에 다시 안치될 때, 반목과 갈등이 아닌 평화와 자비로 가득 찬 부처님의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 그림3-1>> 송림사5층전탑 사리외함

 

▲ 그림3-2>> 송림사5층전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8세기 초),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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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ː 덕성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통일신라 약사불상의 연구」로 석사학위를, 「간다라 불전도상(佛傳圖像)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