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세밑에 되새기는 님의 한 말씀

내 마음의 법구

2010-01-29     고규태

걷는다.

문득 은행잎 하나가 어깨 위로 내린다. 노랗다. 가볍다. 조용히 어깨를 스치고 더 아래로 간다. 땅에 눕는다. 내 발길에 밟힐까 나도 모르게 옆으로 비킨다. 잠시 뒤를 돌아보고, 눈길 돌려 올려다보는 가로수. 어느새 앙상해져 있다. 몇 낱의 마지막 잎새들을 매달고 찬바람에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2009년도 막바지다. 그러고 보니 도시와 사람과 먼 산의 색이 약속이나 한 듯 바뀌어 있다. 엊그제까지 파랬는데 엊그제까지 반팔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울긋불긋이었는데 그런 것 다 넘어 이젠 회색이 짙어졌다. 두꺼워진 옷, 무거운 마음. 내 발걸음이 느려진다. 또 한 해의 저묾을 어이 맞으랴.

사람의 목숨은 깊은 산의 계곡물보다도 빨라서
오늘 살아 있다 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어찌 마음을 단속치 못해 악법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젊은 육체 어느덧 늙음이 달리는 말과 같노라.
그런데 그것을 믿어 교만을 일으키겠는가?
- 『 열반경 』


생각에 잠긴다. 너무나 빠름에 놀란다. 늘 익숙해지기도 전에 월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나이 하나를 더 먹곤 한다. 그리고 벌써 쉰을 넘었다. 귀밑 머리칼이 갈수록 희끗희끗해지고 있다. 안경을 안 껴도 신문이며 잔글씨를 볼 수 있어 좋다 했는데 의사 왈 노안(老眼)이 왔단다. 그럴 때가 됐다고 한다.

덧없음이여. 한 순간이여, 찰나여. 님의 말씀을 되뇌어 본다. 깊고 높은 산의 계곡물보다도 빠르게 세차게 흐르는 세월. 달리는 말처럼 속히 늙어가는 것이 내 몸이요, 한 생이라는 님의 말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럼에도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살아왔는가.

지나온 내 발걸음을 짚어보니 낱말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교만.

그렇다, 팔 할이 교만이었다. 잘난 건 하나도 없으면서 큰소리를 쳤다. 겉으로는 겸손을 내보여도 속으로는 자신만만해 했다. 스스로를 능력이 좀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내 자신보다 남의 잘못과 허물을 보는 데 더 열중했다. 귀는 닫고 입은 더 많이 열어온 나날이었다. 내 편과 네 편을 분별하고, 내것 네것을 가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끊임없는 욕심을 ‘의욕’ ‘추진력’ 따위로 슬쩍 뒤바꿔 치장하고선 이리저리 좌충우돌해 왔다. 그러는 사이에 욕심은 과해져서 탐욕으로 변하고….

이렇듯 내 교만이 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연이어진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채 수시로 잊어먹는 『열반경』의 말씀이 새삼스럽고 부끄럽다. 기울면 떠오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여서 경인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뿌리 깊은 이 교만을 어찌하랴.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는 2009 세밑이다. 한 해의 저묾과 함께 나의 교만도 저물어 가기를.

젊은 육체 어느덧 늙음이 달리는 말과 같노라.
그런데 그것을 믿어 교만을 일으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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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태
시인. 1959년 전남 화순 출생. 1984년 시전문지 『민중시』 제1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 『겨울 111호 법정』 『장시 萬佛山』 등을 간행했다. 불교 노래 「삼경에 피는 꽃」,「무소의 뿔처럼」, 환경 노래 「갯벌사랑가」, 「도요새」, 「우리는 하나」 등 다수를 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