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에는 호랑이 선생님이 있다

만남, 인터뷰 /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법진 스님

2010-01-29     관리자
“조금 전에 책을 봤는데….” 법진 스님은 기자와 만나자마자 어떤 책 두 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프가니스탄, 콩고 같은 분쟁 지역을 취재한 어느 여성 포토저널리스트의 책이라고 했다. 스님은 자신이 느꼈던 감동을 기자에게도 전해 주고 싶은 듯 그 책에 나온다는 스토리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은 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후유증으로 죽은 어느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이야기, 반군들에게 성폭행 당한 어느 콩고 여성의 이야기…. 듣기에 무척 괴로운 내용들의 연속이었지만 가만히 듣다 보니 기자 역시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현장성의 힘이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작전 중인 미군들도 따라다니고 하면서 정말 힘들게 취재했더군요. 위험한 현장에서 치열하게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라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어요. 그걸 보다 보니 이런 생각을 들었습니다. 우리 불교에도 이런 치열함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해인사 승가대학의 도전
해인사는 지난 2006년 12월 4일 해인사 승가대학 교과개편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당시 통과된 개편안은 기존의 승가대학 교육체계를 크게 바꾼 것이었다. 우선 이 개편안은 『치문』·『서장』·『도서』·『선요』 등 선어록의 한문 텍스트를 읽는 것이 중심이 되던 교육과정을 혁신하여, 초기불교·아비달마·중관·유식 등 불교의 여타 분야도 비중 있게 공부하게 하였고 외국어 교육을 추가시켰다. 또한 수업시간을 주당 24시간으로 대폭 늘렸고, 교육평가도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 해인사 승가대학은 내용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면에서도 변화를 꾀했다. 승가대학의 학사를 새로 짓고, 교실도 현대화시킨 것이 그러한 일들이었다. 인천의 사표가 될 승가를 보다 잘 교육시켜보자는 뜻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법진 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으로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 후 법진 스님은 교계의 들끓는 비판에 직면해야만 했다. 해인사 승가대학의 교과개편 때문에 조계종 기본교육의 틀이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확고하다.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불교가 있었습니다. 초기불교부터 해서 아비달마, 중관, 유식, 여래장, 밀교 등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불교가 나온 것은 연기, 무아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과거의 선배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던 시대에 따라 어떤 때는 공관으로, 어떤 때는 유식으로, 또 어떤 때는 여래장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여러 불교에 대한 이해, 곧 불교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필요 합니다. 과거의 강원(현재의 승가대학)과 같이 중국 불교, 그것도 송나라 때의 선불교만 가르친다면 과연 그러한 보편적인 이해가 가능할까요?”
‘불교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 못지않게 법진 스님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시대 자체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해인사 승가대학에서는 이념, 정치, 철학, 과학 등 여러 측면에서 ‘현대성’을 살펴보는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언어교육도 중시하여 영어는 7학기, 일본어와 중국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4학기를 이수하게 하고 있다. 학인들에게 책 한 권을 읽혀도 그냥 읽히지 않는다. 독서 후에는 읽은 책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감상문 격인 ‘리액션 페이퍼(reaction paper)’를 쓰게 함으로써 항상 주체적, 비판적 독서를 하게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인들을 너무 괴롭히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법진 스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각적인 교육을 통해서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수행자를 길러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인들이 공부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긴 하지요. 하지만 한 학기에 학인들 가운데 20% 정도는 공부하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의 학구열이 있어야 우리 승가대학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승가대학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학인들을 만난 법진 스님. 학인들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바깥 세상이 가르쳐 준 것
불교 교육에 대한 법진 스님의 문제의식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스님은 10대 후반에 출가하여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머리에도, 가슴에도 와 닿지 않았다. 80년대 초반에는 금산사 화엄학림에도 갔지만 여전히 공부는 어렵기만 했다.
“굉장히 좌절했지요. 『기신론』에 보면 마음에 진여문하고 생멸문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왜 중요한 것인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화엄경』에 나오는 법계에 대한 설명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구요. 심지어는 내가 왜 이런 것을 읽어야 되나 하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던 법진 스님은 일반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뭔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밖에서까지 불교를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스님은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은 젊은 시절 스님의 불교 공부가 힘겨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것을 미덕으로 칩니다. 하지만 막상 밖에 나와 일반 학생들을 만나 보니 어린 나이에 출가했던 저는 그들에 비해 경험도, 상식도 너무 부족하더군요. 제 인생의 그런 빈 구멍들 때문이었는지 공부도 어려웠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나름대로는 계속 헐떡거리며 노력했지만 채워도 채워도 끝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지요.”
하지만 법진 스님은 공부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을 가는 것으로까지 스님의 공부는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곳을 거쳐 UCLA에서 공부하던 스님이 급거 귀국하여 해인사에 교수사로 온 것은 2003년의 일이었다. 그때 스님은 승가대학의 교육이 자신이 있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음을 발견했다. 자신이 했던 공부를 바깥 세상에서 이미 한번 돌아본 스님은 승가대학의 모습에 대해 문제의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승가대학의 교육제도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보통 선근이 부족해서 그렇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선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일단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만한 스스로의 경험과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것들을 길러 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 해인사 승가대학 도서관 앞에서. 해인사는 승가대학의 발전을 위해 학사를 새로 짓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이 새 도서관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반드시 치열해야 한다
법진 스님은 ‘무주묘행실(無住妙行室)’이라는 글자를 자신의 방에 걸어 놓았다. 스님은 불교의 여러 문구 가운데 ‘무주묘행’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무주’는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에서 온 것이고, ‘묘행’은 바라밀행을 뜻한다.
“무주(無住)한다면, 곧 마음이 머무는 바가 없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우리는 일체의 가식과 선입견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사람을 대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뭐냐, 종교가 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가 아닐까요?”
법진 스님은 ‘무주(無住)’하고 난 다음의 일에 대해서도 말했다. 마음이 머무는 바가 없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면 어떤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오히려 모든 면에서 무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무주’ 다음에 ‘묘행’이 바로 따라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마음이 머무는 바가 없어 무한책임을 지게 되었으니 자연히 바라밀행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법진 스님은 승가 교육을 통해 한국불교의 미래에 이바지하는 것을 자신의 묘행으로 삼고 있는 듯 했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묘행’이란 무한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무한책임에 대한 인식은 승가 교육을 맡은 스님을 활화산 같이 치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도무지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학인들 만나고, 강의준비 하고, 리액션 페이퍼 체크하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학인들은 강의 좀 줄여 달라고 사정을 하지만 그의 눈에는 줄일 만한 강의는커녕 더 늘리고 싶은 강의만 보인다.
“학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불자들은 너희들을 보면 삼보에 귀의한다며 모두들 합장을 하고 절을 한다. 그런 너희들에게 지식도,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도, 치열함도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실 스님이 생각하는 치열함은 한 개인으로서의 수행자들이 가져야 할 미덕만은 아니다. “이 시대의 불교 역시 이 시대 나름의 불교로서 치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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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진 스님 _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 금산사 화엄학림을 거친 후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UCLA에서 수학했다.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