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는 애증의 굴레

대중문화산책 / 영화 <똥파리>

2010-01-29     관리자

2009년을 감히 독립영화의 해로 말한다면 무리일까? 사실 한국영화의 기록적인 관객점유율과 관객 천만시대를 운운하는 것은 모두 상업영화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올 초 개봉한 <워낭소리>가 말 그대로 기적적인 흥행몰이, 그로부터 3개월 뒤 개봉한 <똥파리>가 해외 영화제에서의 연이은 수상과 대중적 관심을 얻자 작은 영화가 한국영화계의 불황을 타계할 대안이라는 들뜬 전망까지 나왔다. 불편한 주제와 소재, 스타가 없는 작은 영화 <똥파리>는 마케팅과 자본의 힘이 아닌 ‘진정성’으로 진검승부한다. 그건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연기까지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큰 무기이자 동력의 핵심이다.

똥파리는 결국 똥파리를 낳을 수밖에 없는가

주인공 상훈은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쉽게 말해 깡패다. 그가 내뱉는 말의 70%는 욕이고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안하무인이다. 어느 날 여고생 연희와 시비가 붙은 상훈은 여느 때와 같이 주먹을 휘두르며 겁을 주지만 연희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대든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엄마와 동생을 잃은 상훈, 참전 후유증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아버지와 양아치 오빠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연희 -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숨기지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별다를 것 없는 상훈의 일상은 출소한 아버지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고, 그를 둘러싼 상황과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똥파리>는 결코 쉽지 않은 영화다. 오프닝부터 감당하기 힘든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고 카메라는 굉장히 메마르게 이를 담는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 하나! <똥파리>는 피가 낭자하게 튀거나 손목과 발목을 툭툭 부러뜨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미술과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은 촌스럽고 영상보다는 드라마에 치중하는 영화이기에 시각적으로는 매우 무미건조하다. 음악 또한 좀처럼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고, 깡패들이 나오기는 해도 현란한 액션 장면 하나 없다. 결국 다시 말하건대 <똥파리>가 괜찮은 영화로 회자되는 건 순전히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연출력 덕분이다.
배우 출신의 양익준 감독은 이 영화에 섣부른 동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훈과 연희, 상훈과 그의 아버지, 상훈과 이복누이, 그리고 조카 형인 등 상훈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는 차라리 악연에 가깝다. 서로 뒤섞인 채 어느 한쪽도 청산하지 못하고, 혹은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이는 증오는 지리멸렬하고 피곤하다. 많은 영화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희망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관객의 숨통을 트여주는 배려를 하지만 <똥파리>는 섣부른 낙관과 동정을 절대 허락하지 않은 채 시종일관 썩소를 날리며 관객을 괴롭힌다. 그리하여 연민과 동정, 후회 따위는 애초에 싹을 잘라버리려는 듯 영화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그리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를 상훈에게 씌워 놓는다.
아버지에 대한 상훈의 증오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행사했던 폭력에서 비롯됐다. 그 폭력으로 엄마와 동생이 죽었고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지만 결국 상훈은 아버지처럼 타인에게 폭력을 쓴다. 우습게도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전지전능한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아들에게 구타당하는 비극을 맞듯 상훈 또한 그에 상응하는 비극적 최후에 직면하게 된다.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도 바꿀 수 없는 연(緣)
상훈은 자신의 피를 다 뽑아내어 가장 미워하는 아버지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절규한다. 그러나 엄마와 동생의 죽음을 탓하며 아버지를 구타하던 상훈은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못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의 핏줄을 바꿀 수는 없는 법. 그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의 가장 인간적인 혹은 연약한 순간을 목격한다. 물론, 그건 아주 잠시일 뿐이다. 영화는 다시금 냉정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상훈과 연희에게 가해진 가난과 가족의 굴레는 사회적, 그리고 태생적 운명이기에 한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영화 <똥파리>는 이에 대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갑론을박을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관객에게 온전히 맡겨 놓지도 않는다. 엔딩 시퀀스를 비롯해 몇몇 인서트 장면들이 몽환적으로 보이기는 해도 감독의 시선은 매우 확고하고, 그렇기 때문에 <똥파리>를 진짜 냉정하고 뚝심있는 영화라 말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가족 문제로 힘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운명으로 맺어진 인연에 대한 한탄의 수위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선택권이 없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개인주의의 심화와 산업발전이란 미명 하에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이제 가족의 울타리마저 그 견고성이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하는 지금, 누군가 가족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질기고도 강한 운명적인 인연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떠올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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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_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석사 수료. 수년간 국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과 출판 관련 일을 했으며, 2001년부터 잡지와 웹진에 영화 및 DVD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