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지혜의 삶이 수놓은 전신투지(全身投地)

거사와 부인이 함께 읽는 불경이야기 /『천수경』

2010-01-29     관리자
‘세우면 탑이고 눕히면 절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경전 순례였습니다. 법신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일주문 앞에서 출발했던 우리의 발걸음은 금강문과 천왕문과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 문턱을 넘어 불단에 계신 부처님께 다다랐습니다. 동시에 진신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탑 앞의 지반에서 떠났던 우리의 걸음 역시 하층 기단과 상층 기단과 탑신의 각 층을 지나 노반과 복발과 앙화와 보륜을 넘어 마지막의 찰주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저 기단부와 일주문에 해당하는 아함경전 군(群)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함경전 군에서 다시 대웅전의 불단과 불탑의 찰주를 바라보니 『천수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서 우리 도반들은 1년 동안의 마지막 경전 순례를 한국 불자들의 소의경전인 『천수경』으로 정했습니다.

청화 거사 _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입니다. 그 동안 우리 도반들은 제법 눈이 맑아지고 귀가 밝아졌지요. 해서 경전은 ‘만대의 의지처[萬代依憑]’라는 말이 새삼 다가옵니다. 『천수경』에는 ‘광본(원본)’과 ‘약본(송본, 誦本)’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대장경의 밀교부에 들어있는 광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약본’을 수지 독송하고 있지요.

정여 부인 _ 이 경전은 여러 이본이 있습니다. 원본으로 인정되는 경전은 가범달마(伽梵達摩) 삼장이 번역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이지요. 불공(不空) 삼장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로 번역했습니다. 이들 광본에서 ‘열 가지 원(願)’과 ‘여섯 가지 향(向)’ 및 ‘천수천안’과 ‘대다라니’를 발췌하여 의식을 거행할 때 독송에 적합하도록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것이 곧 우리가 즐겨 읽는 독송본 『천수경』이지요. 특히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능엄경』의 ‘능엄(신)주’와 함께 가장 널리 읽히는 제일 긴 다라니입니다.

덕만 부인 _ 다라니’와 ‘진언’과 ‘주문’ 등이 함께 쓰이고 있는데‘다라니’란 흔히 ‘모두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총지(摠持, 總持)’라고 번역합니다. 어원적으로는 ‘법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음’을 의미하지요. ‘만트라’는 ‘진언’(眞言)이라고 옮깁니다. 이것은 어원적으로는 ‘생각하는 도구’를 말하며 의미상으로는 ‘허망하지 않은 언어’를 가리키지요. 흔히 좀 짧은 것은 주문이라고 일컫고, 좀 긴 것은 다라니라고 부릅니다.

시당 거사 _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계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의 세계, 영혼의 세계, 불보살의 세계, 귀신의 세계 등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가 훨씬 더 넓고 크지요. 우리가 인식하는 표층의식의 세계는 사실상 심층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요. 때문에 우리가 진언을 자꾸 외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공덕 부인 _ 이 경전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를 통해서 바람직한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길이는 매우 짧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해서 옛날부터 이 경전의 수지 독송을 적극 권장해 왔습니다.

만산 거사 _ 이 경전은 밀교부에 속해 있지만 선법(禪法)과도 매우 상통합니다. ‘다라니’를 일심으로 외우는 순간 일체의 다른 생각들이 끊어지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8독, 1,080독 등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승만 부인 _ 현장 법사는 ‘다라니는 번역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왜 번역을 하고 있는지요?

도오 거사 _ 아마도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고 행하면 우리의 마음과 정성이 거기에 담기게 되어 훨씬 더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민락 부인 _ 하지만 마치 우리 인체에도 드러내지 않고 감춰놓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다라니도 번역을 하지 않고 감춰두면 더 낫지 않을런지요?

청화 거사 _ 물론 가능하겠지요. 과거에는 그런 뜻에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다라니는 번뇌를 없애는 ‘의미 없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정여 부인 _ 이 경전의 주체인 관음보살은 광본(원본) 『천수경』에서는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관음여래이지요.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은 서방정토에서는 무량수불이라고도 합니다. 나아가 관음과 미타는 한 몸이면서 두 부처님이라고까지 말하지요. 무량수전이나 미타전 혹은 극락(보)전에 가면 주불이 아미타불이고 좌보처가 관음보살입니다.

시당 거사 _ 의상 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에는 관음보살을 도와드려야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의 고난을 덜어주기 위한 관음보살의 일손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 되기를 발원하는 천수행자(千手行者)는 관음보살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요. 반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케 할 것이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공덕 부인 _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서의 관음보살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관음보살을 불러내어 우리가 대상으로 부르는 관음보살을 도와주라는 것이군요.

만산 거사 _ 그렇습니다. 불교의 ‘발원’과 ‘서원’이 다 그런 지향을 지니고 있지요. 즉 바깥에 계신 불보살님께 ‘무엇을 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불보살님을 불러내어 저절로 ‘무엇을 하겠습니다’로 전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승만 부인 _ 내 안에 있는 지혜와 자비를 불러내어 그것을 문수와 관음과 같은 보살로 인격화하여 스스로 발원하고 서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문수보살이 되고 관음보살이 되는 것이지요.

도오 거사 _ 그렇습니다. 바로 『천수경』의 ‘관음신행(觀音信行)’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지요. 대상을 통해서 오히려 주체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대상과 주체의 분기는 사라지고 보살행만이 행해지겠지요.

민락 부인 _ 한국인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고 제일 친근하며 매우 자주 읽고 외우는 『천수경』이 불교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청화 거사 _ 사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내 밖에 있지도 않지요. 진리는 가까운 데에 있고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고 보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겠지요.

정여 부인 _ 바로 그것이 한 해 동안 불경을 읽어오면서 느껴오던 것이었습니다.

환정 거사 _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우리는 왜 너무 멀리서 찾았을까요? 내 몸이 법당이고 내 마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듣고도 말입니다. 내 집이 절이고 내 식구가 부처님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으니 말이지요.

덕만 부인 _ 그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는데 ‘가슴’을 넘어 ‘온몸’으로 전해지지 않았는가 봅니다.

시당 거사 _ 『천수경』을 읽으면서 ‘순간이 전부’라는 인식의 전환을 체험했습니다. 부처님은 오직 ‘~만’과 ‘~뿐’ 하는 이 순간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역설해 주셨지요. 우리의 과제는 그것을 이제 얼마나 온몸에 익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공덕 부인 _ 아무리 많은 경전을 본다 하더라도 ‘본 것’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반감되겠지요.

만산 거사 _ ‘앎’과 ‘삶’의 거리를 최소화시키려는 삶을 사는 이가 ‘보살적 인간’ 내지 ‘불교적 인간’이라면, 그 거리를 무화시킨 이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승만 부인 _ 부처님은 ‘참으로 아는 것’은 진실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셨지요.

도오 거사 _ 부처님은 “이 연기의 바다는 참으로 깊다. 감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아함경』에서 역설하셨지요. 요즈음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연기의 바다 속에서는 연기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자맥질하다가 고통의 바다에 빠져 죽을 테니까요.

민락 부인 _ 오늘의 나의 성취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과 협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통찰이 연기법이지요. 한 해 동안 불경을 읽으면서 오늘의 나의 성취가 있도록 인연을 맺어준 이들에게 나의 성취를 다 나눠주기를 서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는 많은 경전과 도반을 만났습니다. 특히 거사와 부인들이 함께 모여서 불경을 함께 읽고 공부하는 것을 현실화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더 이상 ‘역할 모델’을 대상화해서 바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 속에 자리해 있는 ‘원력’을 불러내어 함께 불경을 읽어가려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속인’ 혹은 ‘신도’라는 의미를 넘어 거사와 부인들 스스로가 ‘부처님의 제자’요,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수행의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아가 부처님의 모습이 내가 흉내내고 닮고 배우고 넘어서야 할 나의 ‘역할모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