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명과 같이 부처님께 시봉하라.

권두언

2009-12-19     관리자

 부처님의 은혜는 높은 하늘이며 깊은 바다와 같습니다. 높은 하늘은 언제나 우리를 굽어 살펴 굴곡이 없게 하며 깊은 바다는 온갖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한 번에 맞이하나 주름살이 없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중생이라 하고 이 은혜를 알고 믿어 시봉하는 사람은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쉴 틈이 없습니다. 높아야 하고 깊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밝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차별이 없습니다. 어째서 [나와 너]의 차별이 있겠습니까. 나와 너의 차별이 있다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상대가 있어 언제나 대립` 투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마침내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게 되면 오만과 원망이 함께 어울려 한계가 생겨 끝없는 윤회 유랑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 유랑의 윤회를 초월한 분입니다. 보살은 이 길을 본받아 한없이 겸손하고 한없이 자비로와 이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분입니다. 이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쉽지 않기에 실천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실천적 의지는 그저 자양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사무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마음이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 내 마음은 대상에 부딛쳐 흔들리는 겉모양의 마음이 아니라 흔들리는 뿌리의 마음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나뭇잎들이 흔들립니다. 나뭇잎이 요란하게 바람으로 흔들린다고 뿌리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나뭇잎이 뿌리없이 있지 않듯이 나뭇잎과 뿌리는 하나 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마음은 이 나무뿌리 입니다. 이 뿌리는 나뭇잎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진정 이 뿌리와 잎이 하나인 그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는 아니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현실이 있습니다. 마음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마음이란 이러한 현상에 집착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곧 나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우리는 어떻게 시봉하고 있습니까? 어떤 부처님을 깊이 믿는다는 신자는 부처님은 곧 이 마음이다. 그러니 부처님을 시봉하는 것은 이 마음이지 절에 모신 부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인즉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해서 절에 모신 부처님은 부처가 아니요, 내가 그 존상에 예배하고 공경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이 마음이 부처라는 자기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한 것은 절에 계신 부처님 존상이나 저 바위나 밭에 메논 소나, 닭이나 모두가 부처라는 뜻인데 어떤 것은 부처라고 생각하고 어떤 것은 부처가 아니라 생각하다면 그것은 이미 이 마음은 부처가 아니라, 어떤 때는 바위로, 소로, 닭으로 마음이 변하였으니 이미 마음은 부처가 아닌 것입니다. 마음은 바위요, 소요, 닭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부처로 되어야 하고 부처 이외의 것은 하나도 없음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시간과 장소, 질과 량을 초월하셨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예경하고 존중하고 위의를 갖추어 모신다는 것은 참으로 부처님을 시봉하는 첫째의 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미를 바치고 꽃을 올리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절에 주지스님이십니다. 대부분 절에는 신도들이 꽃 공양을 하지 스님들께서 직접 공양하는 일은 그렇게 많이 보지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 주지스님은 스스로 꽃 공양을 하지만 꽃 공양하는 방법도 특이합니다. 종래 이 절의 꽃 공양은 아마 꽃꽃이 하시는 분이 예쁘고 조화롭게 하였던가 봅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지스님께서 큰 꽃 항아리를 사왔습니다. 그 용도는 부처님 앞에 놓은 꽃을 이 큰 항아리에 꽂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이 꽃꽂이 하는 보살의 꽃이 예쁜데 투박한 항아리에 꽃을 꽂을 것은 없지 않느냐고 투정을 했습니다. 이때 이 주지스님의 말씀이 "우리가 부처님을 예배하고 존중한다고 꽃을 공양하면서 아름답고 깨끗한 부분은 저희들이 정면으로 보고, 거칠고 마른잎은 부처님이 보게끔 되니 이것은 부처님 시봉이 아니라 시봉을 빙자해서 자기가 시봉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꽃을 항아리에 담으면 꽃꽂이 하여 놓을 때처럼 거칠은 위가 부처님 앞에 보이지 않고 두루 보기가 좋으니 항아리로 바꾸는 것이다."하고 꽃꽂이 꽃을 부처님께 올리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참으로 자그마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처님 시봉은 바로 이러한 곳에 있지 않는가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처님께 공양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절실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시봉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젊은 대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큰스님을 찾아 뵙고 오면 그들은 이미 곧 큰스님이 된 듯 하였습니다. 스님께 화두를 받았다고 하면서 법당의 부처님께 참배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고, 방편에 매달리지 말고 직접 본질인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어가야 한다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불자일까요? 오히려 진정한 불자는 소박하지만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고 존중하는 그 사람이 불자인 것 같습니다. 불자가 절에 가지 않는다면 불자가 아닙니다. 절에모신 부처님이나 자기 집에 모신 부처님이나 간에 예불하지 않는 사람은 참다운 불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불자도 내외가 하나가 되고 명실상부한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자는 곧 부처님께 시봉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그 뜻을 심부름하는 사람이 보살이요 불자입니다.

 부처님을 사생자부라하였습니다. 인자하신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께 시봉 잘하면 효자입니다. 그러하듯이 우리 모두 불자라고 한다면 부처님을 시봉하고, 공양하는 정성이 끝이 없어야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이 마음이 부처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명 부처님 생명, 내생명 같이 부처님을 시봉합시다.

 (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