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바램을 성취한 욱면

우바이 만세 여성불자 만세

2009-12-17     관리자

  종교는 어떠한 특수계층의 전유물일 수 없다. 종교는 신분의 계급 높낮이에 구애되지 않는다. 종료라는 총괄적인 체계에 다시 불교라는 한 갈래로 빠져나오더라도 마찬가지다. 불교가 한 때는 귀족불교로서만이 인지되었을 것이나 그것이 불교의 본령은 아닐 터이고 다라서 불교는 일반 서민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12세기에서 13세기로 접어드는 고려의 찬란한 불교문화(또는 문명) 속에서 불교는 서민을 대상은 물론 귀족들이었다.
  일연국존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든가, 「광덕과 엄장」 「희명의 도천수관음가」 「욱명의 왕생」 등 서민들의 불교신앙과 그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의 모습을 소리 높여 부르짖었고 그들의 신앙현태에 고딕체로써 표현했던 것은 일연국존의 제세시가 귀족불교에 놓여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증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설화들이 일연 스님의 창장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설사 그러한 실화가 전래되어 왔다 해도 그것을 표기화한 일연의 사상과 일연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회상황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를 재해석해야 하는 의미도 소중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상황과 연결된 상태에서 그 가치는 배가하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천한 사람들의 신앙 활동에 대해 얼마만한 관심을 갖고 있는가. 행여 고위층의 교화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만은 않는가. 소외된 계층을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튼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는 모든 생명들에게 함께 필요한 가르침이다.

  서린고사(西隣古寺)에 불등(佛燈)이 밝았는데, 아아, 방아 찧고 돌아와 보니 밤은 이경(二更)이다. 스스로 한 소래로 부처를 이루고자 손바닥 뚫어 끈 꿰니 형체를 잊었네.

  경덕왕(景德王)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서기 742년에서 764년간에 해당한다. 강주(康州)의 청신사 수십 인이 모여 미타사를 창건하고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라는 계를 조직하였다. 회원 중에는 아간(阿干)의 직위에 있는 귀진(貴珍)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귀진의 집에는 욱면(郁面)이라는 한 여종이 있었는데 주인인 귀진을 따라 미타사에 이르러 절의 대웅전 앞 한가운데 서서 염불을 하곤 했다.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족의 신분들의 모임인 외원들과 함께 법당 안에 들어가 염불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진은 욱면이 함께 따라와 염불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노비와 함께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염불한다는 것을 빙자하여 그 시간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귀진이 욱면을 싫어하는 심리는 복합적이었다.
  귀진은 욱면에게 매일같이 숙제를 주었다. 곡식 2섬(네 가마니)을 찧은 뒤에는 염불회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욱면은 오로지 염불회에 참석하겠다는 일념으로 방아를 찧었다. 그녀는 방아를 찧으면서도 생각은 미타사에 가 있었다.
  그녀는 무심으로 방아를 찧었다. 그녀가 방아를 다 찧고 나면 2경(更)이었다. 밤 아홉시 경 그녀는 미타사를 향한다. 그녀의 행위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형식적일 뿐 설사 미타사에 이르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아미타불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절에 도착하여 대웅전 앞마당 한가운데서 염불삼매에 든다. 그녀는 졸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법당 뜰(마당) 양쪽에 말뚝을 박고 노끈을 맨다. 손바닥에 구명을 뚫어 끈의 양쪽 끝을 손바닥에 꿰어 합장한 채 밤낮으로 염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린다.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
  이 소리는 욱면에게만 들린 게 아니었기에 만일 미타회원들은 욱면을 법당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얼마쯤 정진을 계속하던 중 갑자기 서쪽으로부터 하늘의 음악[天樂]이 들려오더니 욱면이 문득 몸을 솟구쳐 지붕[천정]을 뚫고 날아올랐다.
  대중들이 놀라 밖에 나와 바라보니 욱면은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욱면이 날아간 쪽을 향해 달려가 보니 그녀는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벗어버리고 진신(眞身) 즉 부처의 모습으로 변하여 연화대 위에 앉아 자금광의 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얼마동안 하늘의 음악이 이어졌으며 일연 스님이 살았던 고려시대에도 그 천정은 뚫어진 채로 있었다고 한다. 자그만치 500여 년 동안이나.
  위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일연국존은 향전(鄕傳)이라 하고 승전(僧傳)에 의하면 그녀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관음의 화신이었든 아니면 그냥 귀진의 집 여종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인이라는 점이며 즉신성불하여 서방으로 가기 전 남의 집 노비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종의 천한 신분이면서도 특히 여인이었다는 것과 그녀가 다른 귀족계급을 물리치고 당당히 제일 먼저 성불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이는 일연이 법화사상을 지닌 대승불교인이었다는 얘기도 되지만 신라시대에 법화사상이 이미 사회전반에 두루 퍼져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원시불교, 또는 소승불교에서 여인의 성불 불가능을 얘기하고 있고 또한 일천제의 성불 불가능을 설하고 있는데 반해 법화경에서는 일천제의 성불은 물론 여인의 성불까지 얘기하고 있다. 다만 법화사상은 여인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변성남자(變成男子)하여야 함을 들고 있으나 욱면의 경우를 보면 여인의 몸 그대로 부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여인이 왜 성불할 수 없는가.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붙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남녀는 평등한 법이다.
 『부모은중경』에서는 여인이 불법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 남자보다는 불리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신도 구성원을 보자 남자신도와 여자신도의 구성비는 엄청난 차이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법당에서고 어떠한 모임에서고 온통 여성 불자들이다. 여성 불자의 천국이다. 한국불교의 현재상황은 여성 불자들이 이끌어간다. 아니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과거에도 한국불교의 주역은 여성이었고 앞으로도 우리의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주역은 역시 여성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욱면 여인의 즉신성불과 같은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문제는 한 생각[一念]이다. 어느 만큼이나 한 생각을 이루느냐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어떤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국불교를 ‘치마불교’라 하여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과연 남자들이 그리 큰 소리 칠고 있을 만한 게 못 된다.
얘기가 사잇길로 새어 나갔지만 하여튼 우리는 욱면의 성불을 통하여 우리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면에 있어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일이다.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이 절에 오면 버선발(양말발)로 뛰어나가 아첨하고 맞이하면서도 돈 없고 가난하며 하위계층의 서민들이 절에 오면 딱딱거리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다. 일천제나 여인의 성불 불가능을 얘기하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가 어떠한 지위에 처했든 어떤 사람이든 성불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가 어떠한 지위에 처했든 어떤 사람이든 성불의 가능성을 평등이 지니고 있음을 확고히 믿는 대승불교임을 자부할 일이다.
  그런 뜻에서 욱면은 천 년 하고도 몇 백 년 뒤인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불가능성의 평등함을 가르쳐 준 위대한 여성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곧 다름 아닌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본령으로 한 위대한 보살이었다. 욱면여인이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