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내려놓아라

내 마음의 법구

2009-12-09     나희덕

여러 해 전 시인들 몇이 종림 스님과 짧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함께 다니는 동안 스님은 조용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사실 나는 여행을 다닐 만큼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아니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빚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나를 불러낸 것도 아마 좀 쉬면서 머리를 식히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나 역시 애써 웃으며 여행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까지 숨길 수는 없었던 것일까. 바닷가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일행들이 바다 구경을 나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에 종림 스님이 나에게 넌지시 말씀하셨다.

다 내려놓으라고.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감당하려 하지 말라고. 내려놓고 고요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남의 집 불을 들여다보듯 할 수 있으면 된다고….

내 사정을 말씀드린 바 없지만 스님의 눈에는 내 등에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훤히 보였던 모양이다. 우리의 대화는 무슨 선문답처럼 얼마간 이어졌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쫓기던 마음은 한결 고요하고 평화로워졌고, 이후로도 고통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다.

내려놓아라. 방하착(放下着).

널리 알려진 이 불교용어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찾아와 힘을 발휘한 것은 삶이 가장 무겁게 느껴질 때였다. 하지만 조주(趙州) 선사가 엄양(嚴陽)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삼엄한 가르침이었다. 다음은 조주 선사와 엄양이 주고받은 대화의 한 대목이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놓아라.”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내려놓기 싫으면 짊어지고 가거라.”

조주 선사가 내려놓으라고 한 것은 엄양의 인간적 고통이나 집착이 아니었다.

한 물건도 갖지 않았다는, 다 비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이 정도면 다 내려놓았다는 자만심이야말로 수행자가 빠지기 쉬운 착각임을 조주 선사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하착’은 오히려 고통의 시절을 거의 통과한 지금에야말로 내게 필요한 충고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위로처럼 들렸던 그 말이, 이제 집착이나 두려움에서 어지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죽비처럼 어깨를 아프게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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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이 있고, 산문집 『반 통의 물』,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