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 안 하고 도인인 척, 아는 척 하지 말라”

흠모 /석암 스님의 제자 정련 스님

2009-12-09     관리자
▲ 석암 스님
가면서 생각하고 오면서 생각하며
정련 스님이 동국대학교 이사장에 처음 취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걱정했다. ‘지금도 챙겨야 할 식구가 많은데. 식구가 더 많아져서 힘들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내원정사 살림은 물론이고 유치원 운영, 몰운대 사회종합복지관, 그리고 거제도에 있는 마하재활병원까지 6개 기관에 그가 챙겨야 할 식구만 200명이 넘는다. 그런 그가 여러모로 녹록치 않은 동국대학교 거대살림을 맡은 것이다. 게다가 일을 일로서만 대하지 않고 가족처럼 품고 진력을 다하는 스님의 성격을 잘 아는 이들로서는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가 툭 던진 해법이 참 쉽다.
“가면서 생각하고 오면서 생각하면 돼요. 그리고 가서 잘 하고, 와서 또 잘 하면 되지요.”
스님은 근심 한 조각 없는 맑은 낯빛으로 웃어보였다. 

꿈처럼 행복한 출가의 길
사실 일은 못하는 사람에게나 무섭지 일이 손에 익은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저 예사로이 보는 법이다. 정련 스님도 보기와는 다르게(?) 타고난 일꾼이다. 50년대와 60년대, 그 어렵던 시절에도 밥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 많은 대중을 넉넉히 외호했던 부산 선암사. 바로 선암사 석암 스님 밑에서 농사 짓고 소 먹이며 단련한 일손이었고, 근기였다.
정련 스님은 열여섯에 처음 석암 스님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숨 차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부모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열여섯에 가출을 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허덕이던 아이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역에서 만난 스님으로부터 받아든 선암사 주소가 인연이 되어 부산 선암사로 찾아들게 되었다.
“밥도 못 먹고 걸어걸어 갔습니다. 가뜩이나 뼈밖에 안 남았는데, 숨도 허덕이던 아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겠죠. 석암 스님이 그런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너 엄마 말 안 들었구나’ 하시는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아하 정말 도사로구나 싶었죠. 그리고는 ‘밥 안 먹었지’ 하시며 밥을 갖다 주셨는데 그게 쌀밥이었습니다. 그때는 부자들도 쌀밥 못 먹을 때였는데, 얼마나 꿀맛이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꿈처럼 행복한 출가’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28명의 행자와 함께 선암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시간이 퍽 좋았단다. 공양간 ‘보이’ 노릇하면서, 마침 그 무렵 선암사에서는 천일기도 회향일이 백일 남짓 남아 얼결에 난생처럼 기도도 따라하며 하루하루 보냈다. 그런데 그 회향일 즈음에서 스님은 꿈에서 백의관음을 만났단다. 더 신기한 것은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산에 올라가도 숨이 차지 않고 달음박질을 해도 쌩쌩하더라는 거였다.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3년 동안 행자를 하리라 다짐하며 정식 출가의 뜻을 발원했다.
“행자 3년 동안 밥을 하며 단 한번도 태우지도 질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시키지 않아도 혼자 기와장 빻아서 그릇 닦고 밥하고, 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행자가 끝나고 계 받을 때가 됐는데, 우리 스님이 나를 제자로 안 받겠다는 겁니다. “총무스님에게 가라.” 그래요. 총무스님에게 가면 ”노장스님에게 가라“ 하면서 서너 달을 끌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스님은 총무스님 몸이 아픈 것이 염려가 돼서 저를 그리로 보내려고 하셨고, 총무스님은 우리 스님이 걱정돼 저를 보내려고 하셨던 거라고 합디다.”

받는 불교가 아니라 베푸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당시 부산 선암사에는 눈밝은 선지식을 비롯해 눈푸른 운수납자가 운집해 있었다. 모범스님들만 모여 있어 선암사에서는 서로 주지를 안 하려고 싸움을 하고, 차비 줄려고 하면 밤에 도망을 치던 그렇게 맑고 아름다운 풍경이 벌어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석암 스님도 총무원장 제의를 받았을 때도 그렇고, 성철 스님이 하룻밤 자면서 해인사 주지를 맡아줄 것을 청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 무렵 주지를 맡았던 향곡 스님이 석암 스님에게 주지 자리를 떠넘기고 석암 스님이 그 자리를 받기까지 어떤 일들이 오고갔을지는 족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석암 스님은 가람수호의 원력 그 마음으로 도량을 외호해갔다. 사실 석암 스님은 만공 스님 회상에서부터 10여 년간을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며 선지를 얻었던 선사였고, 자운 스님으로부터는 율맥을, 동산 스님으로부터는 계맥을 받은 전계화상이었다. 그러나 석암 스님은 그 무엇도 내세우지 않았다. 언제나 뒤에서 가람 수호에만 진력을 다했다고 한다. 아무리 살림이 쪼들려도 대중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고 당신 혼자 탁발을 나가 고비를 넘길 정도로 가람외호에 지극했다.
“우리 스님은 ‘시주에 의지하지 말자. 받는 불교가 아니라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신 스스로 돈이 조금만 생겨도 알뜰하게 모아서 땅을 사셨어요. 그리고 그 땅에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선농일치의 삶을 사신 거죠. 하지만 땅이 많은 만큼 운력도 많지요. 농사 짓고 소 먹이고 절살림 보고 끝이 없습니다. 벼농사 철이 되면 물을 대도록 하기 위해서 밤 새워 일할 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스님은 어김없이 전지분유를 맛나게 타서 밤참으로 가져오십니다. 그 칠흑같이 어두운 논길을 따라 전지분유를 타서 조심조심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행여 우리가 힘들어할까 걱정돼서 ‘올해는 풍년이다.’ 하며 다독이고 크게 웃어주던 스님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덕분에 선암사는 그 어렵던 시절에도 1년 내내 밥이 넉넉했고, 1958년부터는 절 밑 판자촌 마을 집집마다 쌀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당신의 서원대로 ‘받는 불교’가 아니라 ‘주는 불교’의 싹을 스님은 그렇게 틔워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회향되고 있는 ‘석암장학회’가 그 하나의 열매일 것이다.

스승의 뜻을 이어간 길 - 대중을 화합하게 하는 지혜
스승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련 스님은 한때 율사의 길을 생각했지만 ‘베푸는 불교’를 향해 수행의 길을 열어갔다. 부산 내원정사를 창건하는 것부터 유치원을 세우고, 복지관을 운영하고, 그리고 거제도에 마하재활병원을 건립하는 것까지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다. 내원정사를 창건하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다. 천막법당에서 법회를 보고 밤이면 침낭에서 잠을 청한 세월이 7년이다. 산림보호법에 막혀 건립 허가가 나지 않았을 때도 스님은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심어 허락을 받아냈고 나중에는 산림청으로부터 산림보호 표창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 석암 스님이 그토록 염원하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내원정사를 창건, 새싹포교와 복지불교의 근간을 마련해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 대중을 화합하게 하는 지혜, 그리고 마침내 회향해내는 정진, 정련 스님은 그런 점에서 스승 석암 스님과 닮아있다.
석암 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겐 더 없이 엄격한 율사였지만 대중에겐 더 없이 편한 어른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마을사람들이 차 마시자고 하도 찾아와서 동네에는 석암 스님과 차 마시는 그룹이 생기기도 했었다. 차도 아무 차나 다 오케이였다고 한다. 커피, 녹차 등 원하는 차를 자유롭게 마시며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다 맞춰 행복한 시간을 석암 스님은 베풀어주었다.
“참 자비로우셨어요. 지금도 기억납니다. 행자 때 자다보면 은사스님이 팔베개하고 토닥거려주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항상 밥을 방석 밑에 깔아놓고 저를 기다리셔요. 그리고 제가 오면 따뜻한 밥부터 먹입니다. 또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제가 들어갈 때까지 불이 켜 있고 제 방문이 닫히면 그때서야 불이 꺼져요. 그러니 밖에서 밥도 먹을 수가 없고 먹었어도 또 먹어야 합니다. 외박은 상상도 못하구요.”
그렇게 석암 스님은 당신 속정까지 다 제자에게 보여주시고 떠나갔다.
정련 스님은 스승을 회고하면서 단 한 번도 동국대 이사장으로서, 혹은 종단의 중역으로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어필하지도 않았다. 현재 맡고 있는 다른 살림이나 직책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련 스님은 스승의 행장을 정리한 파일을 들고 오로지 처음부터 스승을 회고하는 그 마음에만 충실했다. 일부러 물어보았다.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서의 어떤 서원을 갖고 계십니까?”
“석암 스님 유훈이 ‘남을 속이지 말라’였습니다. ‘도인인 척,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화합은 내 마음을 열고 상대방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늘 하심하고 늘 물어 석암 스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화합하는 길로만 걷겠습니다.”

▲ 정련 스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석암 스님 _ 1911년 경기도 포천 출생, 1930년 황해도 구월산 월정사로 출가했다. 1940년 구월산 패엽사 불교강원을 졸업하고, 1941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정혜사 만공 스님 회상에서 수행하였으며, 통도사 천화율원에서 율장을 연구했다. 1961년 범어사 주지로 취임했으며, 1987년 부산 내원정사에서 세수 77세 법랍 57세로 입적하였다.

정련 스님 _ 1958년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3년 천막 법당인 부산 내원정사를 짓고 포교를 시작하여, 현재 내원정사유치원, 사회복지법인 내원, 재단법인 내원청소년단, 몰운대종합사회복지관 등을 운영하며 부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발전시켰다. 조계종 포교원장,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부산시 경찰청 경승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이사장, 석암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97년 조계종 포교대상 대상과 2002년 국무총리 표창(사회복지 증진)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