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

김춘식의 행복한 시 읽기

2009-12-09     관리자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이대흠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사상계」(1959. 2) 중에서

박재삼(1933~1997)_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삼천포에서 자랐다.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1955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섭리’,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냈고,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비 듣는 가을나무』(1981), 『찬란한 미지수』(1986), 『해와 달의 궤적』(1990), 『허무에 갇혀』(1993) 등의 시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중알일보 시조대상, 조연현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 . 평 .

인생살이에 곡진한 사연 한 가닥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것이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이든, 또 누군가의 그리운 추억이든, 가슴 깊이 가라앉은 소리 죽은 기억의 강물 같은 것, 마음 속 한 자락에 누구나 깊이 흐르고 있으리라. “마음도 한 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어쩌면 뒤숭숭해진 마음 탓에 잊었던 기억을 떠올릴 지도 모르고, 또 가을 햇볕이 좋아 길을 나서다 그 햇볕 속에서, 먼 과거 어느 날의 햇볕을 또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어느 등성이, 어느 거리에서, 나뭇잎 위에 반짝이는 햇볕과 바람과 낙엽 속에 익숙하게 다가오는 얼굴이나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 순간 기억의 강물은 몸 속 곳곳을 돌아 울음으로 바뀔 수도 있으리라.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붉게 타오르는 강물과 노을 속에서, 삶의 혹은 기억의 서러움과 곡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 사랑 산골 물소리에서, 그 사랑 끝에 생긴 울음을 삼키고, 그리고는 마침내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와서 소리 죽은 울음을 우는 가을 강의 모습은 삶에 대한 진정한 슬픔과 그리움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강물은 이 점에서 인생에 대한 비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첫사랑을 알던 산골에서 시작된 물이, 울음을 울며 계곡을 흐르다 결국 그 울음소리 녹아 잦아들면 오직 조용히 바다로 흘러만 간다. 그리고 바다에 이른 강물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설움이 녹아버린 진한 슬픔이 담긴 강,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다. 울음이 타고 있는 붉은 강만큼 깊은 슬픔을 또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울음도, 미칠 것 같은 마음도 잦아들어 모두 붉은 울음이 되어 조용히 강물과 저녁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그런 슬픔을 이 시는 잘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그 가을 강의 울음은 ‘네보담도 내보담도’ 더 슬픈 강이고 울음을 죽이고 있는 강이다. 그러니 ‘저것 봐, 저것 봐,’라고 말하며 자신의 슬픔을 그 강물 속으로 풀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자연이, 강이, 사람의 슬픔보다 더 깊은 울음을 보여주며 사람을 감동시키고 위로하는 장면, 그런 장면이 이 시에 담겨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춘식 _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시작」 편집위원이며, 평론집으로 『불온한 정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