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

지혜의 향기 / 정신 차렷!

2009-12-09     관리자
가을이다. 계절만 가을이 아니라 나의 인생도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었다. 이제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열기는 점점 식어 가을을 지나 추운 겨울을 맞이해야 하듯이, 내 인생도 절반의 고지를 넘어 서서히 내려가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만 남았다.
여태까지 나의 삶은 그래도 일상적인 과정을 별 탈 없이 겪어왔다고 생각한다. 큰 병도 앓지 않았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 부모님도 계시고, 학교 때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해 아들 딸 낳아 기르고…. 다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예술을 한답시고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대학 입학해서 든 동아리였으니 말하자면 캠퍼스 커플인 셈이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 군대 가기 전인 대학 3학년 때 흑심(?)을 품고 접근해 연인으로 발전하였고, 결혼해 아직도 한 이불을 덮고 지내고 있으니 아내에 대해 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아내는 학생시절부터 화장을 잘 안 했다. 내가 화장한 모습을 본 것은 결혼식을 포함해서 몇 번 안 된다. 나보다 키도 크고 웃는 모습이 순수해보여 꽤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나도 속으로는 은근히 아내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생각을 해왔다.
결혼 초 월급을 타서 내가 관리해 생활을 할 때는 마냥 적자였다. 한 5년 그렇게 하다 관리권을 아내에게 넘기고 용돈을 타서 생활을 하는데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아내가 그 적은 돈으로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성적표를 보여주는데 우리 때와 달라져 도대체 잘했는지 못했는지 알아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아내는 금새 이해하고 또 적당한 수준의 학원까지 구해낸다. 대학 입학시험은 수시와 정시 가, 나, 다 군이 있어 개념도 잊어버린 순열 조합을 동원해야 이해할 수 있는데, 아내는 금새 나에게 설명하고 있다.
아내는 또한 친정과 시댁의 온갖 대소사를 기억하고 적당한 금액의 돈을 지출한다. 이사를 할 때도 집을 구하는 것은 물론, 새집에 들기 전 칠도 하고 도배도 한다. 작년에 썼던 물건이나 옷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금방 찾아 내손에 쥐어 준다. 밥상에 나온 반찬 그릇을 나는 아무리 차곡차곡 냉장고 안에 넣어도 다 넣지 못하는데 아내는 금새 다 넣는다.
아내는 이렇게 발전해 가는데 내가 문제이다. 촬영 간답시고 툭하면 지방에 가고, 새로 나온 장비 산다고 카드를 긁어대고, 노후를 대비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전시한다고 목돈을 써대고, 내가 하는 일이 예술인지 술인지 이틀이 멀다하고 늦게까지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가고, 아침에 해장국 찾고….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아내의 눈치를 슬슬 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달에 있는 개인전을 핑계로 어제도 12시를 넘겨 들어가 오늘 아침 간신히 일어나 나오는데 말없는 아내가 불쌍한 듯 쳐다본다. “정신 차려 이 화상아! 아직까지 당신이 청춘인줄 알아?” 정신이 퍼뜩 들어 아내를 보니,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집 나서는 나를 배웅하고 있다.
하늘은 맑고 높아 가을이다. 내 인생도 가을이다. 이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젖은 낙엽’의 처지를 받아드릴 정도로 인격이 성숙해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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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_ 사진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했다. ‘農民-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 ‘Picture Postcard’, ‘Old Photo Album’ 등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2008년 송은미술대상에 입선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작품이 소장되기도 했다. 한편 9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암갤러리에서 ‘江山無盡’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