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기 위한 숨 고르기

지혜의 향기 / 정신 차렷!

2009-12-09     관리자
시간 도둑놈. 나는 방송 일을 그렇게 부른다. 일단 개편 시즌에 일을 시작하면 다음 개편까지 약 6개월간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곧 죽어도 방송 원고는 넘겨야한다. 남들은 하루 2~3시간 바짝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룰루랄라~ 여유 있게 보내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2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 원고를 쓰려면 원고로 쓸 만한 소재 찾기부터 코너별 아이템, 출연자 섭외까지 하루 종일 신경을 써야 한다. 진행자의 스케줄이나 방송 여건에 따라 녹음이라도 잡히면 거기에 맞춰 원고를 준비해야 하니 늘 시간에 쫓기고, 그러다보면 6개월이 정말 후다닥 지나간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것 같은 프리랜서지만 오히려 시간에 끌려가는 상황이 돼버리기 일쑤다.
얼마 전 방송국에서 피자를 시켜먹었는데 위생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날 밤부터 심한 설사를 했다. 상태가 좀 심각했지만 당장 넘겨야 할 원고가 있었고, 괜찮아질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화를 불렀다. 결국 급성장염으로 인한 탈수증세로 응급실행! 초강력 항생제와 수액을 24시간 동안 맞은 후에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의사는 최소 4일,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1주일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네?” 눈앞이 노래졌다. 당장 내일부터 원고를 어쩌란 말인가? 온몸의 진이 다 빠져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질 않았다. 우선 주변 작가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단체문자를 보낸 후 병원 측에 인터넷을 쓸 수 있는 1인실이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No~! 남은 병실은 6인실뿐이며 링거주사를 계속 맞아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도 사용해선 안 된다고 했다.
교통사고 장기 환자들이 누워있는 701호 병실 구석자리 침대에서 나는 수액을 맞으며 시든 화초처럼 하루를 보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더니 링거를 계속 맞자 신기하게도 기운이 조금씩 살아났고, 슬금슬금 방송 원고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환자용 식탁에 노트북을 켜고 간호사 몰래 원고를 썼지만 주사바늘을 꽂은 손에는 통증이 왔고, 다른 환자들은 나를 흘낏흘낏 쳐다봤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거든요~’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자판을 두드리는데 의사가 회진 차 병실에 들이닥쳤다.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방송작가인데 원고를 넘겨야 한다고…. 의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장염으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글도 중요하지만 건강부터 챙겨야죠. 몸이 건강해야 글도 쓰는 거 아닙니까?”
나는 1년 반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일리프로그램 2개와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느라 피로와 스트레스로 어깨와 목에 심한 통증이 와 매일매일 침을 맞던 그 무렵이다. 젊은 한의사는 이렇게 몸을 돌보지 않다간 나이 들어 고생한다며 일을 좀 줄이라고 당부했었다. ‘그래,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다음 개편에 일을 접고 스페인으로 6개월간 장기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을 통해 쉬어가는 것이 멀리 가는 비법이라는 깨달음을 가슴 깊이 느꼈건만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과부하에 걸린 것이다. 벌써 10월이라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쉬운 때이지만 시원해진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한 호흡을 고른다. 잘 쉬었으니 남은 4/4분기도 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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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화 _ 방송작가로 ‘KBS 무대’, ‘뮤직N 유영석입니다’, ‘한동준의 브라보 마이웨이’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집필했으며, 현재 교통방송과 BBS ‘거룩한 만남’을 집필 중이다. 지은 책으로 여행에세이 『바르셀로나의 도둑고양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