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7. 깨달음의 길

2007-06-07     해주스님

  연기(緣起)의 깨달음은 등정각(等正覺)이요 해탈이며 열반이다. 연기법의 관찰도 중도의 실천처럼 괴로움을 소멸하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안온한 해탈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다. 앞에서 살펴본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인연이 그러하고 십업설(十業設 : 身業3. 口業4. 意業3)과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이 그러하다. 

부처님의 모든 교설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며 길이다. 그리고 부처님 재세 당시 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수행의 최고 경지는 아라한 이며 해탈 열반에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존 입멸 후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불(成佛)이야말로 수행의 구경 목표가 되었다. 모든 중생들에게도 다 부처될 성품이 있으며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님의 아들 딸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자각, 부처 되고자 하는 마음이 보리심(菩提心)이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발심(發心)이다. 그리고 발심한 자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보살이 구경에 되고자 하는 그 부처(佛)는 복혜구족(福慧具足)의 양족존이며 무량한 공덕을 갈무리한 법신(法身)이다. 깨달음의 길은 복과 지혜등 무량공덕을 닦는 공덕행(功德行)으로 그 비중이 옮겨졌다. 원시 부파불교시대보다 한층 더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출세간의 열반법에 조차도 집착하지 않는 출출세간(出出世間)의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연기(緣起)의 법칙성에 따라 제법은 무아며 무자성공(無自性空)이다. 생사법만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열반법도 무자성이다. 세간법만 공한 것이 아니라 출세간법도 공하다. 생사든 열반이든 일체 제법이 무자성공인지라 둘이 다르지 않다. 그러한 진리를 여실히 바로 보는 지혜가 반야이며 반야의 실천과 완성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생사가 곧 열반이요 나와 남, 남과 내가 둘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나를 위하는 일이 남에게 이로움을주는 것이며, 남을 위하는 모든 공덕행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다. 그 길을 가는 자가 보살이며 보살의 길이 바로 성불의 길이다. 해서 보살의 모든 공덕행은 반야바라밀이 그 기초가 되며 반야바라밀이 보살만행을수반하는것이다. 대승경전의 저변에는 반야공사상이 자리하고 그 위에 온갖 보살도가 구축되어 부처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모두 다 함께 갈수 있는 대승보살의 길이고 누구나 같이 도달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세계이기에 경에는 무수한 방편문이 시설되고 있다. 팔만사천방편 해탈문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대승의 최초기 경전인 [반야경]에서는 반야공에 입각한 반야바라밀 중심의 육바라밀을 설하고 있다.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경명도 이를 뜻함이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반야)바라밀의 육바라밀이 대승보살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일컬어짐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반야경]에서는 경의 유포(受持讀誦 . 爲他人說)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경의 유통을 역설함은 대승경전 공통의 것이다. 아예 경전의 수지(受持) . 독송(讀誦) . 해설(解說) . 서사(書寫)를 보살의 4종 수행법으로 중시한 곳도 있으니 [법화경]이 그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그 외에도 아주 다양한 수행법을 시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상불경(常不輕)이라는 보살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예배만 할뿐이었다. " 나는 깊이 당신을존경합니다. 감히 가볍게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다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我深敬汝等 不取輕慢 所以者何 汝等皆行菩薩道 當得作佛)."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사부대중에게 절하는 것이 상불경보살의 수행이었다.  또한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그리든지 장엄하면 불도를 이루며, 탑묘. 불상. 탱화에 꽃이나 향 내지 음악으로 공양 올라더라도 불도를 이룬다고 한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모아 불탑을 만들거나 손가락으로 불상을 그리더라도 다 이미 불도를 이루며, 탑묘 안에서 일심 아닌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 나무불(南無佛) ' 이라 부르기만 해도 이미 다 불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보살도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에스는이런 일불승(一佛乘)적 견지에서 대승보살도를 설하고 있다. 신심(信)을 기조로 하여 십주(十住) .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단계를 거친 마지막 십지(十地) 계위에서 다음과 같은 보살도를 시설하고 있다.  처음 환희지에서는 십대원 (十大願)을 세우고 제2 이구지에서는 십선도(十善道)를 행하고 제3 발광지에서는 삼법인을 관하며 제4 염혜지에서는 삼십칠조도품을 실천하고 제5 난승지에서는 사성제를 닦으며 제6 현전지에서는 십이연기를 관하고 제7 원행지에서는 십바라밀을 완성하고 제8부동지에서는무생법인을 증득하며 제9 선혜지에서는 사무애지를 얻고 제10 법운지에서는 대법우를 뿌리는 것이로 되어있다. 나아가 제 1지로부터 제 10지까지 차례로 십바라밀이 배대되어 있기도하다. [화엄경]에서는 육바라밀에다 방편(方便) . 원(願). 력(力). 지(智)등 4바라밀을 더하여 십바라밀을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만수(滿數)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바라밀을 닦는 보살은 말이 필요없고 사성제를 닦는 성문도 십이연기를 관하는 벽지불도 다 같이 한줄기 불승(佛乘)속에 있다. 아함에서 대승에 이르는 전불교교리를 망라하여 십지의 수행계위를 조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환희지에서의 십대원이란 공양원(供養願). 수지원(受持願). 전법륜원(轉法輪願).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 성숙중생원(成熟衆生願). 승사원(承事願). 정토원(淨土願). 불리원(不離願). 이익원(利益願). 성정각원(成正覺願)이다. 이 열가지 대원을 근본으로 삼아 무량서원을 내고자 함이니, 정행품에만 140원이 세워지고 있다. 보살의 청정한 신. 구. 의업이 원(願)의 모습으로 보여짐이니 원력이 클수록 보살행이 광대해지는 것이다. 

다음 십선도는 초기 대승의 계법인 십선계에 해당된다. 이는 원시교설에도 십업설의 적극적인 선한 행위로 강조되고 있다. 이 십선도를 화엄경에서는 지계바라밀의 내용으로 하여 마음의 때를 여의도록 하고 있다. 대비심(大悲心)이 없이 십선도를 닦으면 성문지. 연각지에 이르고, 대비심으로 닦으면 불지(佛地)에 오르게 됨을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는 발심한 후 53선지식을 역참 하면서 낱낱 선지식으로부터 해탈문을 성취하게 된다. 대비행을 베푸는 관세음보살의 대비행해탈문(大悲行解脫門)이라든지, 사자빈신비구니의 성취일체지해탈문(成就一切智解脫門), 해당비구의 반야바라밀삼매 광명법문(般若波羅蜜三昧光明法門), 구족우바이의 무진보덕장해탈문(無盡福德解脫門) 등 50여 해탈문이 보이고 있다. 이처럼 숱한 깨달음의 길을 열어 놓고있다. 그리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지라 그 마음을 잘 활용하여 (善用其心) 중생의 삶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할 것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고 있다.

여타 대승경전에서도 각기 수 많은 수행 방편문을 설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전을 소의로 하여 형성된 학파. 종파에서 연구할 교리 발달에 따라 보살행문도 계속 발굴되어 갔다. 그리하여 우리가 평소 접하고 있는 실천법, 즉 예불. 염불. 칭명. 송주. 기도 . 불공. 조탑. 요탑. 창사. 독경. 간경. 사경. 면벽. 관심. 좌선. 참선. 포교. 설법. 청법 등도 모두가 수행아닌 것이 없다. 일체가 깨달음의 방편 아님이 없다. '불사문중 불사일법 (佛事門中 不捨日法)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하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들도 수행이 수승한 분야가 다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상과 같이 많은 방편문을  크게 보면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두문으로 나눌수 있다. 혼자 힘으로 불국토에 갈 수 없으면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의해서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력. 타력 두문도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해서이다. 햇빛을 통해 해를 볼 수 있듯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부처가 되는 길을 깨우쳐 주신 분이다. 길을 밟고 다녀야 길이다. 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예{전에 있던 길이 없어질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만들 수도 있다. 더 빠르고 안전하고 너른 길을 닦을 수도 있다. 해서 많은 방편문이 시설되어 왔던 것이다. 

성불의 길, 불국토를 이루는 길은 많다. 길을 깨쳐 가는 것 그 행위가 깨달음이라고 감히 말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