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란 무엇인가?

구도문답

2009-12-08     관리자
     삼매란 무엇인가?

[문] 불교 수행에는 삼매를 얻어야 한다든가, 삼매가 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또 어떤 때는 삼매에 드는 것은 바른 수행이 못된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삼매가 무엇이며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답] 삼매는 범어의 사마디를 음대로 적은 것입니다. 등지(等持), 정(定) 또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고 번역합니다. 대체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 것을 뜻하는데, 등지라는 말은 마음이 들떠 있거나 혼침한 상태를 떠나서 평등하고 편안하며, 이것이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머물게 함으로써 얻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삼매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어지럽거나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그 상태의 깊이에 정도에 따라 지혜를 얻고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인데, 염불 삼매가 되어야 한다든가 공부는 삼매가 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말은 이런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삼매를 말하게 되는 것은 진리는 원래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적인 것이라는 것이며, 이 본래적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범부들이 망념을 일으켜 그 마음이 산란하며, 산란한 마음에 따라 경계가 어지럽게 벌어지고 다시 어지러운 경계에 사로잡혀 휘둘린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여기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것이 둘째의 요점입니다.
   이 휘둘린 경계, 산란한 마음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삼매 수행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휘둘린 경계에서 벗어나고 산란한 상태에서 안정을 얻는 방법으로, 어떠한 경계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든가 성인의 명호에 집중한다든가 하여 휘둘린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이 수행이 관법 또는 염불법인 것은 누구나 아는 바입니다.
   다시 말하면 휘둘린 마음을 벗어나 안정된 상태에 이르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청정심이 됨으로서 본래의 법, 깨달음의 진리를 보게 하며 알게 하며 듣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범부의 수행에 있어 삼매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며, 삼매의 깊고 얕음에 따라 깨달음의 크고 적음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색계 천인들이 그가 얻은 선정의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천상세계를 감득하는 것은 이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생각할 때, 깨달음의 진리는 본래의 것이며 불변의 것이며 완전하게 현전된 법입니다. 범부라고 하여 변하거나 멀리 간 것이 아니고, 범부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부성에서 벗어나고 청정 경계를 얻었다든가, 깊은 삼매 경계에 들어갔다면 이것은 분명히 망령된 경계에서 하는 말입니다. 닦아서 얻을 삼매나 들어갈 삼매가 있다면 참 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본래의 법, 현전의 법을 보는 것이며 깨달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참선에서 추궁하는 공부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입장에서 말하면 얻거나 들어갈 삼매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분명히 보고 깨달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삼매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범부성을 인정하고 범부 처지에서 출발하는 한 수행법에 필요한 것이고, 삼매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본래법을 깨닫는 상승 수행에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리(舍利)는 무엇인가?

[문] 고승이 열반에 들어 다비하고 나서 사리를 얻었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재가신자에게서도 사리가 나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리는 어떤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답] 종래 스님들이 입적했을 때 절에서 다비를 합니다. 다비할 때 보면 장작이나 숯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으며 그 위를 젖은 가마니로 두릅니다. 그리고 시신 바로 아래 깊숙이 밀폐한 단지를 묻고 단지에는 물을 담습니다. 또 화장장 사방 네 모퉁이에도 물그릇을 놓습니다. 이 단지와 물그릇은 사리를 거두자는 뜻입니다.
   종래 사리는 이와 같이 해서 다비한 후에 단지나 물그릇에서 얻은 구슬 모양의 영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리는 시신에서 나온 신령한 구슬로 일러지고 고승에 한하여 나오는 것으로 알려 왔으며, 때로는 고승의 사후, 기도해서 얻은 사리도 있고 그밖에 신비하게 볼 수 있는 사리도 있다 했습니다.
   오늘날에 사리라는 것이 어떻게 얻어지고 있는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구슬 같은 영골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리는 원래로 신체, 신골의 뜻으로서 시신이나 유골을 말합니다. 범어의 <샤리이라>를 사리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리는 이와 같이 유골의 뜻이며 통상적으로는 부처님의 유골을 불살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령한 구슬의 일종으로 알려지고 이것은 두터운 신심으로 산 사람, 정결한 계행을 가진 사람, 중생을 위하여 널리 헌신한 사람 또는 깊은 경지의 수행을 쌓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생전 수행력이 응고하여 나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는 원래적인 의미보다 통설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의 명칭

[문] 절의 명칭에는 사 또는 암 또는 정사라고 한 곳이 있고, 큰 절에는 총림이라 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절의 명칭에 대해서 어떤 구분이 있는지요?
[답]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여러 명칭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 존상을 보완하고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절입니다.
   대개로 사 · 암 · 정사 · 난야 · 총림, 여러 이름이 있으나 뜻은 같은 것입니다.
   범어에 ‘비하아라’와 ‘상가아라아마’가 있는데 전자는 유행처(遊行處)라고 번역되고 후자는 가람이라고 적고 중원(衆園)이라고 번역되나 모두다 정사(精舍)라고 통용되고 있습니다. 정사는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寺)라고 하는 것은 원래 중국의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외국인을 접대하는 홍로사(鴻矑寺)에 맨 먼저 오신 분이 서역에서 온 스님이었기 때문에 뒷날 스님이 머무는 곳을 모두 <사(寺)>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자 수행하는 곳을 암자라고 하나 이것은 다만 작은 절이라는 뜻 이상의 규정은 없습니다.
   난야는 범어의 아란야를 적은 것인데, 산중 또는 들판이라는 것이 원 뜻입니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기 적당한 고요한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원리처(遠離處) · 적정처(寂靜處) · 공한처(空閑處) · 무쟁처(無諍處)라고 번역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절의 명칭은 사 · 암 · 정사 · 난야 어느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총림은 숲처럼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규율 바르게 화합하며 도를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종합 수도원을 의미하고 또, 종단에서 총림으로 인정을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종합적 수도원 시설이란 선을 공부하는 선원과 교학을 공부하는 강원과 율을 공부하는 율원 등 시설을 갖춘 곳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총림은 그러한 수도원의 격을 말할 뿐 사찰 명칭으로는 쓰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보살과 자재해탈

[문] 부처님은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룬 어른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부처님과 같이 성스러운 경계에 이른 성자들도 같다고 듣고 있습니다. 불보살님께서 해탈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해탈의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답] 미혹이 속박이고 깨달음이 해탈이라면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것은 일체 속박이 없는 자재해탈일 것입니다. 우리는 해탈을 체험하기 어려워도 현실적으로 수많은 속박 속에 살고 있으므로 그런 속박을 벗어난 경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보살님은 그런 제약을 벗어난 완전한 자유이며 막힘없는 자재일 것입니다. 일체 장애에서 해탈한 불보살님은 이러한 위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하는 줄 압니다.
   성스러운 대보살님들이 갖춘 자재력에 대하여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자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관경자재(觀境自在)로서 진리 진여 기타 경계를 관하는 자재이고, 또 하나는 작용자재(作用自在)로서 설법하고 교화하는 작용에 있어서의 자재입니다.
   위 두 가지 기본 자재를 좀 상세히 설명하면 4종 자재, 10종 자재가 됩니다.
   4종 자재란 8지(八地) 이상의 대보살이 갖춘 자재력으로서 1. 분별의 상을 떠난 무분별자재 2. 자유로이 온갖 국토에 태어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정토자재 3. 제9지에 이르러 무애지를 얻어 설법교화에 자재한 지자재(智自在) 4. 제10지에 이르러 일체 번뇌와 업의 속박이 없어진 업자재입니다.
   또 10종 자재란 1. 수명을 자유로이 신축하는 명자재 2. 자유로이 삼매에 드는 신자재 3. 일체 재물에 막힘이 없는 재자재 4. 일체 행업에 자재한 업자재 5. 자유롭게 생을 받는 생자재 6. 원한바대로 깨달음을 얻는 원자재 7. 세계 처처에서 부처님을 보는 신해자재 8. 신통력으로서 불가사의를 나타내는 신력자재 9. 지혜를 얻어 깨달음을 여는 지자재 10. 무량한 교법을 설시하는 법자재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불보살님의 자재는 본래 청정한 완전 원만상을 회복한 자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만인의 본래상을 완전 수용하는 본래인의 자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불보살님의 자재해탈에 대하여 우리가 유의할 것은 부처님을 진해탈(眞解脫)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러 자재한 공덕에 집착하고 중생을 이익하지 못하는 것을 해탈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인데, 불보살님은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보살님의 자재력은 항상 중생을 위하여 끊임없이 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