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저런 생각

보리수 그늘

2009-12-02     관리자
 
  요즈음 우리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난세가 어떤 것인지 잘은 몰라도 분명히 「난세는 난세다」하는 생각이 든다. 단군 이래 최초라고 하는 86아시안게임을 우리가 성대하게 치루어 내었다는 자부심을 갖기도 하고 이때에 열광하던 거국적인 응원 열기도 아직까지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얼마전에는 프로야구인가를 한다고 응원꾼들이 이기지 못한 게임에 불만을 품어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정치적 대립이 그러하고 노산간의 이해가 그러하고 학원가의 소요도 모두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본다.
  도대체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적 의식바탕은 「모두 것」을 「한꺼번」에 성취해야 한다는 이른바 의필고아(意必固我) 의식이다. 왜 반드시 그 경기를 꼭 이겨야 하며 승부의 판가름을 걸고 하는 시합에서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런 시합이 성립될 수 있겠느냐 하고 생각해 본다. 양편이 모두 이기는 경기규칙을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86경기의 개폐회식을 보면서도 많은 상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너무 많은 것을 모두 보여주어야 하겠다는 강한 집념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가지만 중점적으로 액센트를 두어 보여 주는 것이 더 깊이 머리에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은 옛사람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 주위에서는 도처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목격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단번에 모두를 해치워야만 우리들의 마음에 무언가 좀 했다는 위안을 갖는 모양이다. 어떤 공사를 해도 아무리 튼튼하게 잘 했어도 단축시키지 못했으면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꾸준히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밋밋하여 재미가 없고 단번에 빨리 화끈하게 해치워야만 한다. 음식상을 차려도 그렇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야만 잘 차린 것이 되고 아무리 값지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도 상이 어울리지 않고 조출하면 잘 대접한 것이 되지 못한다. 모두를 한 상 위에다 한꺼번에 벌여 놓아서 한번도 젓가락이 가지 않아도 그것을 좋아한다. 계속적으로 가져오는 중국요리와 서양음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우연히 또는 몇 사람들의 약속 같은 것을 통하여 생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핏속에 스며있는 의식의 바탕과 관련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늘 읽어서 쾌재를 부르짖는 흥부 박 속을 연상하게 된다. 당시 흥부로 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온갖 굳은 일을 부부가 함께 발 벗고 나가 하였으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래서 관가에 가 매품까지 팔면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흥부집 생쥐가 쌀알을 찾으려고 온통 사흘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 쌀알갱이를 찾아 헤매어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생쥐는 가래톳이 서서 터져 울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부 박 속에서는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다 쏟아져버렸다. 쌀과 돈과 집과 가구와 약초와 서책과 ··· 등등, 심지어 이 속에서 첩까지 나왔다. 이 순간 흥부 처는 정신적인 고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쏟아서 생활방식을 갑자기 뒤집어 놓아도 괜찮다고 행각한 그 의식의 바탕과 앞에서 지적한 우리네 현실의 바탕 사이에는 어떤 맥락이 통하고 있지나 않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부가에는 일년 정도 넉넉히 먹을 양식과 그 가족들이 열심히 일할 만한 토지를 주는 것에서 그쳐야만 했다. 그래서 그 땅을 땀 흘려 가꾸어 그를 자신들의 노력의 대가로 부자가 되도록 했었어야만 마땅한 것이 아니었을까. 흥부네 자식들은 아마도 문제아가 되었을 것임을 상상해 본다.
  오늘날 사회를 들여다보면서 난세를 사는 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석가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쳤다고 전하고 공자는 「아비생이지지자(我非生而知之者)」라 하였으며 맹자도 세상을 바로잡을 자「비아기유야(非我其誰也)」라 소리쳤다. 백이숙제(伯夷叔齊) 소부허유(巢父許由)도 생각해 보면서 또 다른 사람들의 생을 알아보려고 옛 글을 뒤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