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평화롭게 하는가

보리수 그늘

2009-12-02     관리자
  천둥과 번개는 한여름 장마처럼 가을에 들이닥쳤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하나 둘을 세기 시작했다. 언제고 셋 이상을 셀 수 없었다. 아, 바로 머리위로구나···· 굵은 빗줄기는 내 방의 조그만 유리창을 쉴 새 없이 두들겼다. 간간이 쩍하니 터지는 번개빛이 방 깊숙이까지 퍼져 어른거렸다. 방제일 구석에 걸린 입상작이었던 노파의 사진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색상 한 켠에 놓인 주먹만한 「베토벤」의 석고 흉상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바탕에 꽃힌 「에델바이스」의 액자가 치악산 「국향사(國享寺)」에서 찍은 내 사진이, 두 개의 돌하루방이 ··· 모두가 흔들거렸다. 폭우는 다음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처마의 물받이에서 빗물 소리가 잦아들고 짙은 회색 구름이 차차로 옅어져갔다. 늦은 점심으로 시장기가가시자 버릇처럼 바다가 그리워졌다. 밤새의 두령무과 회한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언제고 그곳에 있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밤새 함께 흔들거렸을 말도 못하는 그 친구가 보고팠다.
  도시의 거리는 채 마르지 않고 있었다. 차들은 덩이덩이 고인 빗물을 덮치며 질주하고 젖은 회색 건물들은 잔뜩 찡그리고들 있었다. 그 사이로 서너개의 아픔들을 가슴에 안고 그리움으로 물방울 무늬진 옷들을 걸친 삶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간밤으로 먼지를 씻어낸 도시는 욕됨과 혼돈 대신에 외로움으로 가득하기만 했다. 아직도 하늘은 제 모습을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억척같던 간밤의 폭우도 바다를 불어나게 하진 못하고 있었다. 바보스럽게 입을 쩍하고 벌리고 침을 흘리며 웃고 있을 뿐 ···. 오는 정월에 첫돌인 조카 태연이 녀석의 아침 인사 같았다. 체기로 숨을 꼴닥이던 간밤의 위기도 잊은 채 내 얼굴을 더듬어 아침잠을 깨우는 녀석의 조그만 손같이···. 파도가 이리저리로 흔들려 내게로 다가왔다. 그 너머로 구름이 쪼개지기 시작하자 틈새와 흠을 비집고 몇 줄기 광선이 불꽃놀이처럼 높이 치솟았다. 방금 터진 내 머리 위 푸른 하늘로 펑펑 터져 번져갔다. 차차로 석양이 어슴푸레히 모습이 나타나면서부터 옹기종기 모였던 구름이 벌겋게 물들어 갔다. 하도 이뻐서 안고 있고만 싶던 바다도 그때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붉게 상기하더니 불빛을 받은 온몸을 마구 흔들어 열광해댔다. 그 편에서 두어뼘 떨어진 곳에선 낮달이 해죽거렸다.
  어리 노을이었다.
  이 도시의 끝에서 떠오른 대자연의 환한 얼굴이었다. 함께 태어나 살고 울고 함께 죽어갈 그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건물을 세울지라도 이렇게 변하지 않고 있을거라고 말하는 것일까 ···. 그 어느 누가 감사하지 않을지라도 마지막까지 온통 자기를 불태워 보시하겠다는 다짐인가···. 폭우와 천둥 번개로 모두가 자기를 잊을지라도 그 위에 언제고 빛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가 ···.
  종이컵에 담겨진 커피 속으로 아물아물 석양이 녹아들었다. 혀끝을 타고 목젖을 적시고 몸 구석구석까지로 번져갔다.
  노을이 말했다. 「너를 위해 우리가 있음이 아니라 너도 나도 이렇게 있는 것이요. 이렇게 어울려 함께 있음이요. 깨우침이 내게 있음이고 네게 있음이요. 내가 없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내가 있어도 보지 못하면 난 없는 것이 아니겠소. 난 그 누구를 미워하지도 그 무엇을 갈구하지도 않소이다. 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어울려 혼자 살기 때문이오. 그것은 내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단지 보이기만 할 따름인 것이기에 그렇소. 또한 난 다시 떠오르기에 그렇소. 나같이 살지 않아도 좋소. 단지 당신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러더니 이번엔 바다가 낄낄댔다. 「그것 봐 내 이제껏 뭐라고 그러던···. 넌 색맹에다 귀머거리야. 이제껏 내 말을 듣기나 했던 거니? 그렇다고 너무 풀죽은 얼굴은 하지 마. 너도 우리보다 나은 점도 있으니까 널 필요 없는 말도 잘할 수 있잖아 사실 우린 그런 것에는 도통 재주가 없거든···. 너무 늦었어 빨리 집에 가봐. 어머니가 기다리시니까.」
  섬이며 별들이며 갈매기며 모두가 날 보며 낄낄댔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보았다. 그래도 더 이상 무엇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발 끝으로 돌멩이를 걷어차며 투덜댔다. 몽상이래도 환상이래도 좋다. 어차피 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 그것으로 사라질테니까···.
  이제 땅거미가 깔리고 사람들의 불빛이 조금씩 어둠을 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