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도 땀흘려 밭을 가나니

청소년 불교강좌

2009-12-02     관리자
 
  많은 경전과 법문을 통해서 불교를 알게 되고 또 많은 것을 얻어 슬기로운 삶의 지혜로 삼는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는 한문 경전과 대승 경전이 매우 난삽하고 부담이 되어 그 진의를 깨닫기가 어렵다. 이에 이른바 초기경전이라 일컫는 아함경에 있는 짤막한 세존의 법문을 통해 현실과 현대인의 갈등을 관조해 보고자 한다. 문답 형식의 게송 가운데 번개처럼 스치는 인정과 지혜가 있다.

    이것이 나의 농사다
  세존께서 마가다국 남쪽의 한 조그마한 마을에 머물고 계셨을 때 일입니다. 늘 그러하듯이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가사를 단정히 하시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러 나가시었습니다. 마을 근처 밭머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리고 가시었습니다. 그러자 일꾼들에게 밥을 돌라주던 바라문이 탁발하러 온 세존을 보고 언짢은 듯이 말했습니다.
『사문이여 나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여름 내내 김을 매서 가을을 걷어 들여 그것으로 양식을 삼고 있소. 그대도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꾸어 가을에 걷어 들여 양식을 삼으시오.』
  이 말을 들은 세존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시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그것을 먹고 살아가고 있소.

  그러자 바라문은 더욱 언짢은 낮으로 말했습니다.
『그대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 하나 내 아직 그대 농사짓는 것 못 보았네. 내 그대에게 묻노니 내 어찌하면 그대 농사짓는 것을 보리오?』
  세존께서 다시 대답하시었습니다.

  믿음이 씨앗이며 계(戒)는 빗물
  지혜는 멍에에 달린 쟁기
  반성(反省)은 그 손잡이요
  선(禪)은 그 줄이라.

  바른 생각(正念)은 나의 호미요
  채찍이니
  몸을 지키고 말을 삼가고
  먹고 마시는 양을 조절하고
  진리로써 풀을 베고

  즐거이 머무르되 게으르지 않으니
  정진은 나를 끄는 소
  나를 고요한 안온으로 이끌어
  행하되 되돌아서지 않으니
  이르러서 슬퍼할 일 없으니
  이것이 나의 농사라

  감로<열반>는 그 열매
  나는 이러히 농사를 지어
  모든 고뇌로부터 해탈했느니


  듣고 있던 바라문은 세존께 예를 드리고 나서
『과연 밭을 잘 가십니다. 감로의 열매를 위해 농사를 잘 지으십니다. 부디 이 음식을 받으시오.』
하고 큼직한 양푼에 음식을 수북히 담아 세존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를 물리치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시었습니다.

  게송이나 읊고 먹을 것을 빌지 않느니
  그것이 지견(智見)있는 자의 법이니라.
  여러 부처께서도
  게를 읊은 댓가를 물리치셨네
  바라문이여, 오직 법에 머물음이야말로

  생활의 도리니
  온갖 고뇌 다 끊겨 이미 괴로움 없는
  진실한 대성(大聖)에게 공양하라
  이것이 공덕 지으려는 자의 복밭이기에


    마음의 밭에다 믿음의 씨앗을 ···
  옛적 인도에는 사성(四姓)의 계급이 있었으며 바라문은 그 최고의 종족이었습니다. 한문으로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음역(音譯)하는 이 계층은 신의 후예라 자처하고 아래 계급의 모든 사람 - 왕을 포함한 - 위에 군림해서 신의 이름으로 제(祭)를 지내고 정치까지도 간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횡포가 심했으며 아래 계층의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라문 중에는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탐욕을 부리거나 온갖 악한 짓을 저지르고 몰락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츰 그 권위가 당에 덜어지자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바라문이 많아졌습니다.
  세존께서 부처가 되시자 크샤트리아(왕이나 무사 등 사성의 제2계급) 출신이 무슨 부처가 되었느냐고 비웃고 학식 높은 바라문들이 찾아와서 토론하거나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라문들이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함경에는 이런 바라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위의 바라문도 다른 바라문처럼 도도했으나 마침내 세존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는 일없이 빈들빈들하면서 남이 땀 흘려 농사를 지어 얻은 양식을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보다 거룩한 농사를 짓고 있음을 알고 세존께 귀의한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밭에다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 믿음이 열매를 맺도록 계(戒)를 지켜 빗물로 삼고 지혜라는 쟁기에다 반성이라는 손잡이를 달고 선정(禪定)을 줄로 삼아 밭을 갈고 바른 생각이라는 호미로 김을 매고 진리를 낫 삼아 108번뇌의 풀을 벤다고 하시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척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농사는 더욱 어렵습니다. 마음은 고삐를 씌울 수도 없습니다. 자루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 가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씨앗을 뿌려놓고 계를 지켜 마음의 행패를 다스려야 합니다. 지혜라는 쟁기로 쉬지 않고 마음을 갈아야 합니다. 늘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흔들림이 없도록 선정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으로 마음의 빗나감을 바로잡아 자른 길로 가게 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순간마다 변하고 시간마다 뒤바뀝니다. 악마의 마음이었다가 금새 부처마음이 되기도 하고 부처마음인가 하면 벌써 악마의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세존께서는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착하기도 않거니와 또 악하지도 않다고 하시었습니다.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합니다. 다만 그 마음이 악하게 되느냐 선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마음을 선·악 어느 쪽으로 몰고 가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결코 남이나 환경의 탓이 아니라 - 물론 주변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를 지녀야 하고 지혜로써 분별해야 하고 바른 생각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른바 108번뇌 온갖 근심·걱정이라는 풀은 세존께서 설하신 진리라는 낫으로 자라날 적마다 깨끗이 베어내야 합니다.
  이런 노력 정진은 마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밭을 가는 소처럼 나를 안온한 경지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고 하시었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편해져서 현대인들은 좀처럼 힘든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꾸준하지가 못합니다. 곧 싫증을 내거나 지쳐버립니다. 물론 바빠진 사회 탓도 있겠지만 대체로 너무 안일하고 너무 편하려고만 합니다. 힘들여 공부하고 쓰고 하기보다는 카세트의 소리를 듣고 타자기로 찍으려고 합니다. 잔글씨로 쓴 책을 보기보다는 그림으로 그려진 만화를 보려고 합니다.
  이런 안일한 생활, 기계화된 생활은 결국 땀 흘리고 노력해서 성취하는 보람을 못 느끼게 되고 보람을 모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 것도 모르게 됩니다. 사람의 정을 모르니까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이기심이 생겨, 남의 괴로움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모래알처럼 각각이 되어버립니다.
  예전처럼 함께 땀 흘리고 일하고 그래서 정을 나누는 푸근한 화합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고 상관(相關)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두 개의 볏단이 서로 의지해서 서있듯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相依性> 는 것입니다. 한 채의집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주춧돌이 있어야 기둥이 서고 기둥이 곧게 서 있으려면 도리가 있어야 하고 도리를 잡아주는 보가 있어야 하고 ··· 이렇듯 이것저것이 서로 어울려야 집이 되듯이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어울리고 돕고 의지해야 합니다. 핵가족시대라고 해서 부모 자식등 한 가족끼리도 따로 사는 것은 과히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끼리의 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훗날 감로의 열매를 맺게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게으름 없이 노력하여 안락에 이르면 그곳에는 슬퍼할 일도 없고 근심·걱정할 일도 없다고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세존께서 농사를 지어 걷어 들인 감로인 것입니다.
올해도 큰 물난리 없이 태풍의 피해 없이 추수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수확의 기쁨 속에 겨울을 맞았습니다. 이른 봄부터 추수할 때까지 구슬땀을 흘리며 가꾼 노력의 댓가로 흡족하고 편안한 겨울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땀 흘리면 반드시 그 보람이 있습니다. 열의 노력을 하면 열의 보람이 있으며 다섯의 노력을 하면 다섯의 보람밖에 누리지 못합니다. 흔히들 「나는 많은 노력을 했는데 보람이 없다.」고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섯의 노력을 하고 자신은 열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고 열의 보람을 바라기 때문에 실망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어떤 인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티끌만한 인이라도 반드시 그 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작다고 그냥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요만한 잘못이야 괜찮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지 법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선(善)이라도 반드시 그 보람은 있습니다. 십 원씩 모아서 언제 큰 돈을 만들까 그만두지 하는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10원이라도 꾸준히 모으고 또 모으면 큰 돈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악이든 선이든 간에 ···. 우리는 흔히 큰 것, 많은 것은 소중히 여기지만 작은 것은 소홀히 여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작은 것을 더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흔히 비유하기를 개미가 뚫은 아주 작은 구멍 때문에 크나큰 댐이 무너진다고 경계합니다.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그것이 빌미가 되어 큰 불행을 낳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청소년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봄입니다. 마음에 믿음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불교라는 훌륭한 볍씨를 잘 싹터서 훌륭하게 감로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오직 여러분 자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먼 뒷날 훌륭한 감로의 열매를 바라보면서 「아, 나는 불법이라는 볍씨를 구하길 잘했다 또 계를 빗물삼아 지혜의 쟁기로 ··· 부지런히 농사짓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한결같이 훌륭한 감로의 열매를 걷우는 날 우리나라는 우뚝한 동방으로서 아니 이 지구 위의 가장 빛나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배달의 후예, 대한의 청소년들이시여, 부디 불법의 볍씨를 잘 가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