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難治病) - 분노(忿怒)-

운악산한화(雲岳山閒話)

2009-12-02     관리자

     참아야 살 수 있는 세상
  분노 한 내 마음에 거슬리는 사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씨입니다.
  이 마음씨는 자기가 욕구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심리이어서 욕심이 있는 곳엔 언제나 그것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작게는 속이 상하는 것으로부터 크게는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싸우는 일까지에 이르러거나 나아가서는 나라 사이의 전쟁까지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세 가지 독(三毒)이라 부른다 하였다. 중생들의 뿌리 깊숙이 젖어 있는 병폐하고도 하였습니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할 일인데 욕심을 내는 것이나 화를 내지 않아야 할 자리에 화를 내는 것은 모두가 어리석음에서 연유한다 하여 어리석음을 꼭 따라 붙게 마련입니다.
  이 어리석음과 탐욕의 합작으로 생긴 분노 때문에 결국 인간은 괴로움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생·로·병·사의 고통이란 것도 우리의 마음에 거슬리는 사건들이므로 괴로운 것입니다.
  만일 내게 맞지 않는 상황에 대하여 달관하고 체념할 수 있다면 그때의 괴로움은 오히려 약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은 모두가 당신을 단련시키는 용광로로 생각하라. 고난을 겪지 않은 즐거움은 환상일 뿐이다. 마치 불매를 거친 쇠라야 단단해지는 격과 같다.」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철학자도 어쩌면 이런 경지를 갈파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경전에서 인욕을 권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온갖 괴로운 일, 마음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하여 잘 참아 넘겨야만 수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백년을 참고 수도했더라도 한 번 화를 내면 모두가 무효가 되고 모든 일에 친절하다가도 한 번만 화를 내면 둘 사이가 계면쩍어 집니다.
  금강산 돈도암에 살던 돈도비구는 평생 동안 수행을 잘 하여 곧 아라한이 되려던 참이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광풍이 불어와서 눈에 먼지가 들어가니 화를 냈답니다.
  이 과보로 즉석에서 백미 되어 그 한을 풀지 못해 아궁이 속의 재에다 꼬리로 그 사실을 써서 후인을 경계했다는 일화는 좀 비약된 것 같지만 분노의 화됨을 가장 핍진하게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 자신도 인욕선인(忍辱仙人)이라 하셨고 우리의 세상을 사바(娑婆)라 하여 참아야 살 수 있느 세계라 하였습니다.
  경전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백 번 참는 집에서 평화가 있다고 강조하여 성내지 말고 참을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가리왕에게 팔다리를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성내는 마음이 없었더니라.」는 구절이 금강경에도 있습니다.
진정한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와 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에 너의 어리석음에 의한 폭행은 가엾이 여길지언정 나 밖의 너가 아니기에 꾸짖거나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참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선택의 지혜로움
  이와 같이 너와 나를 같은 바탕 위에 놓고 상대방의 어리석은 짓이나 포악한 언동이나 딱한 처지에 대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일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 부릅니다. 이 동체대비의 구현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본원(本願)이며 그의 완성이 바로 「할 일을 다 마쳤다」 <能事畢>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참음의 미덕이 지렁이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가 하면 철저한 분노가 오히려 만 생명의 구세주로 추켜세워지는 넌센스를 가끔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데 내 어찌 이 이유 없는 도전에 가만이 있으라는 말이냐고 하는 외침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목신체를 모두 떼어 가도 중생이 원한다면 모두 아낌없이 주라는 보살정신에는 전면 위배되는 주장이 현실에서는 먹혀 들어간다는 얘기입니다. 이 엄청난 이율위반적인 사항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될까요? 여기에 선택의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불보살의 세계에 이르러서 불보살들과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중생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무지로 또는 실수로 저질러 오는 모욕이야 백번 천 번 참아야 되겠지만 고의적으로 모독을 가해오는 행위마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잖고 참는 것만을 능사로 여긴다면 이 보살의 길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제2· 제3의 과오를 더 짓도록 도와주는 행위이기도 하며 불보살의 이상을 펴야 할 자신의 임무를 고의로 포기하는 역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 육백 여 년 내려오면서 우리는 올바른 분노의 가치도 체험하였고 무분별한 인욕의 과오도 경험했습니다.
 맨손으로 일제의 총칼 앞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만해선사를 비롯한 여러 열사들의 분노는 진정 강하면 강할수록 값진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금과옥조 같이 내세우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집단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 하여 30년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살상을 한 종교적 도전에는 세계사의 오점임을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는 데도 법도가 있고 분노에도 정과 사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 자리에서 하나라고 배우는 우리들의 불단(佛壇)에 칼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그래서 심히 무서운 신장상이 꼭 참여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화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신장님들은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요?
  우리네들이 보통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해서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그러한 분노가 아니라 진실을 가로막은 무리에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위엄을 보인다는 데서 우리의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분노는 결코 권장하고 가꿀지언정 억누르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셔서 전 세계에 불교를 펴낸 불교의 모국에는 불교다 없답니다. 그 숱한 불교유적은 깡그리 이교도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힌두교도의 성화에 한마디의 저항도 없이 죽어간 그날의 불교도들을 아무도 인욕성자라 보지 않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문(自問)해 볼 때
  요즘 우리 사회는 밤과 낮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이교도들의 우리에게 대한 도전은 각양각생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대항할려면 해 봐라」하는 식으로 어엿한 불제자에게까지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교회로 나오라고 외칩니다.
  간혹 피 끓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를 제지할려면 「종교인이 왜 이렇게 너그럽지 못하냐?」고 도리어 꾸짖는답니다. 자비를 숭상하는 우리이기에 「새로 상륙한 그들이 설자리를 마련하는 방법이겠지 ···」하고 참았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진실한 공양구라」고만 아는 우리이기에 아들딸이 이 짓을 해도 탓하지 않았고 호국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는 속성이기에 편파적인 처사에도 묵묵히 따랐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보다 월등히 부하고 강해진 처지인데도 우리에게는 계속 조건없는 인욕만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분노(忿怒)!
  그것은 과연 몹쓸 것인가?
  우리에게는 그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번 화를 내면 천하를 평온히 하고야 말리라」는 탕(湯)의 뜨거운 피 같은 것은 없는지?
  아니면 발길에 밟힌 지렁이가 꿈틀하는 정도의 힘도 없는지?
  우리 모두는 이 엄숙한 갈림길에서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