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부처님(1) - 성스러운 탄생-

교학강좌(1)

2009-12-02     관리자
 

    석가족
  우리 앞에 몸을 나투셨던 부처님은 석가여래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 석가여래 부처님은 역사에 없는 인도 나라이기에 정확한 연도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신앙기년에 따르면 한 3000년쯤 된다 하겠습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인도의 땅, 히말라야 산의 남쪽 기슭에 갠지즈강의 한 지류가 되는 라프티라 불리는 작은 강이 있습니다. 또한 그 강의 동북 유역에 로히니라는 냇물이 있습니다. 그 로히니의 냇물 주변에 한 씨족들이 졸망졸망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석가족입니다.
  이 석가족은 인도 본래의 토박이씨족이 아니고 B.C3000년쯤 전에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들이 크게 이동해 남쪽으로 대부대로 내려와서 다시 두 부대로 나뉘어져 한 부대는 서쪽으로 가 유럽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한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힌두구스 산맥이라고 하는 곳에서 갈라져 한 갈래는 지금의 이란쪽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한 갈래는 지금의 인더스 강 유역 오하지방 판자브지방이라고 하는 곳에 자리 잡아 인도 아리안족이 시작되었다합니다. 그런데 판지브지방에 자리 잡았던 인도 아리안족이 다시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남쪽과 동쪽으로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옮기면서 갠지즈강에 자리 잡은 씨족 중의 하나가 석가족(釋迦族 : Sakya)이 됩니다.
  이 석가족이 사실 몇 개의 소왕국을 만들었고 우리나라보다 훨씬 덥지마는 인도에서는 가장 기후가 좋은 편에 속했습니다. 농사짓기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사계절이 우리나라처럼 분명하지 않지마는 그리고 어느 정도 계절이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 감자왕(甘蔗王)의 후예들이 왕국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바로 석가족의 조상이 감자왕입니다. 특히 카필라라는 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이 카필라(kapilavatthu)의 왕이 바로 정반왕(淨飯王)입니다. 또는 백정왕(白淨王)입니다. 보통 원음대로 쓰면 숫도다나(Suddhodana)라고 합니다.
  그 정반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인 데 40여 년 동안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야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바로 우리들의 부처님인 석가여래라고 하는 역사적인 인물 그리고 왕의 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싣달타(Siddhattha)태자라고 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부처님의 탄생을 전하고 있는 불교경전이 상당히 많습니다. 주로 대경전에 보면 본년부에 속하는 경전들은 거의 다 부처님의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전들을 종합하고 그 당시 그런 경전이 설해질 수 있었던 여건 그 당시의 신앙적인 면 사회적인 면, 또 당시 인도에 있어서의 종교인들의 성자에 대한 또 스승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표현상의 문제 등을 검토하여 오늘날 그런 표현으로 부처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또 중국에서 한문으로 옮겨지면서 학문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첨가된 것입니다.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것은 정반왕의 왕궁에서 태어나신 게 아니고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룸비니(藍毘尼 ; Lumbini)라고 하는 동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동산에서 태어나셨냐 하는 것은 경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종합해 보면 그때 인도에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풍속이 옛날에 있었습니다만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친정에 가다가 진통을 심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 경치 좋은 룸비니동산에서 자리를 잡으시고 해산을 아마 하시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부처님경전 특히 전기부분<불전>을 설하신 경전을 보면 거의 대부분 물소리 맑고 새소리 좋고 화창하게 꽃 핀 봄날에 무우수(無憂樹)라고 하는 나무의 가지를 어루만졌을 때,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자가 탄생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이 아기가 바로 사방을 돌아보면서 일곱 발자국을 걷고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그렇게 말했다고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마는 불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불소행찬(佛所行讚)」에 있는 것을 제가 우리말로 옮겨 보면
「이 태어남을 윤회하지 않는 마지막의 삶이 되게 하리라. 하물며 이 생을 불생으로 하리라. 내가 성불하겠다. 이 생에 내가 부처 만들겠다.(此生爲佛生 則爲後邊生 我唯此一生 當度於一切)」라는 말입니다.
  즉 업신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 동안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 제도하는 가르침을 펴신 그 생애를 여기 담아놓고 한 이야깁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윤색을 해서 문학적 선적인 표현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잘못 알려져 상당히 교만하고 아만한테 쓰는 것처럼 써 먹는 고약한 분들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참뜻을 잘못 쓰는 고약함입니다.
  그런데 또 굉장히 많은 수식이 있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그때 마침 하늘에서는 천악이 울리고 향이 자욱하고 꽃비가 내리고 그러면서 아홉 용이 서운은 타고 나타나서 이 내어난 어린 아기를 향해서 분수처럼 물을 뿜었습니다. 그렇게 몸을 씻더라. 이렇게 표현되어 있고 이 아기가 걷는 자국마다 연꽃이 발바닥을 받치더라 하고 미화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타종교인이나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하는 수도 있고 또 우리 스스로도 거기에 상당히 의심을 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도 거짓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걸어 다닙니까?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인도사회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는데 계급별로 태어나는 곳이 각각 다릅니다. 인도의 여러 가지 역사나 인도의 종교관계 철학관계를 조사해보면 아리안족들이 인도를 점령하고부터 거기에 이미 있었던 원주민들을 쫓아내거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버립니다. 수트라족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복해 오면서 하나의 종교를 만듭니다. 바로 바라문교입니다. 바라문교가 확립되어지면서 계급이 철저하게 만들어집니다.
  처음에 바라문교에서의 근본성전이 되는 베다같은 것을 조사해 보면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구약성서처럼 똑같이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파니사드 철학시대에 오면서 그것을 고쳐버립니다.
  바라문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낳았다는 것은 상당히 발전된 종교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재료는 없어도 나중에는 자기네보다 더 크고 실하고 똑똑한 자녀들이 태어나오니까 처음에는 「애」하고 우는게 나오지만도 나중에는 크게 된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힌트를 받았는지 「재료가 없어도 낳으면 된다.」라는 점전설을 말하게 됩니다. 생성점전설이라고 하는 것으로 종교를 합리화시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신인 하느님이 낳은 인간이 바로 바라문인데 바라문의 시조를 처음 낳을 때 어디로 낳았느냐, 그것은 「하느님의 입으로 낳았다.」 또는 「머리 뚜껑을 띠고 낳았다.」 하느님이니까 머리 뚜껑을
띨 수 있지마는 사람은 못 띱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인간의 모습을 지닌 사람은 머리 뚜껑을 못 띠고 입으로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그래서 바라문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그렇고 부처님 이후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바라문들은 입으로 애를 낳는다고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입으로 안 낳으면 그건 바라문이 아닙니다. 내쫓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라문의 산모들은 입으로 안 낳지만 분명히 입으로 낳았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다보니 기정사실이 되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왕족들이나 또는 정치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크샤트리아족입니다. 크샤트리아족은 하나님의 배꼽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옆구리라든지, 겨드랑이라든지 배꼽이라든지 태어날 수 있는 연한 곳에서 나왔다.」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크샤트리아족들이 가장 가지가 태어난 것을 신성하게 이야기할 때 배꼽이니 겨드랑이니 옆구리를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옆구리에서 태어나셨다고 안하면 거짓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 다음에 평민계급<바이샤>입니다. 바이샤족은 「생문에서 나왔다.」 그것은 우리가 애기 낳은 생식기를 통해서 나왔다 합니다.
  제일 계급이 낮은 검둥이 노예 수드라족은 발바닥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발바닥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발바닥에서 나왔기 때문에 새까맣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수드라족의 여자가 계급사회의 철통같은 계율을 모르고 철딱서니 없이 평민이라든지 바라문이라든지 크샤트리아족의 부인들에게 「발바닥에서 안 낳았다.」 이렇게 말하면 맞아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 같은 크샤크리아족에서는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서서 걸어 다니며 또 손을 들고 아래 위를 가리키면서 외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또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가 위인들 전기 쓴 걸 봅니다. 위인전기나 문학적인 자서전 같은 것을 보면 태어난 아기들에 대한 표현들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평생을 용맹스런 용장 영웅으로서 보낸 분의출생 표현을 보면 「웅장한 사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밖에서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사내아긴지 여자아긴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 전기 작가는 표현을 그렇게 합니다. 또 시인이나 인생을 애닲게 살고 간 예술가들은 「아주 인생을 슬퍼하는 듯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 소리에 그 분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이 「애」하고 울었던 그 소리가 윤회의 쳇바퀴속에서 삼독의 노예가 되어서 앞뒤도 못 가리고 분간 없이 짐승처럼 살다가는 인생들하고 어찌 같이 표현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척결해주신 부처님에게는 거기에 적당한 목소리를 담아야 합니다. 즉 생애를 담은 겁니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르는 겁니다. 결국 인생선언 일생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 실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전기를 쓴 분이 누구냐 하면 부처님의 제자 또는 불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그런 표현이 가능합니다.
  거기다가 섰다는 것, 섰다는 게 뭡니까?
  두다리로 선 겁니다. 자립 선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당시는 전부 신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발로 자기 힘으로 걸어 다니지 못하고 전부 신이 걷게 해주고 신이 숨쉬게 해주고 사는 게 전부 다 그랬습니다. 결국 고귀한 인간성 인간의 존엄성 그것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다가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 일곱 발자국도 또박또박 아주 잘 걸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 일곱 발자국이 뭐냐?
  이 말입니다. 여섯은 육도윤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다하면 그 업에 의해서 보를 받게 됩니다. 소가 될 보를 받을 사람은 소가 되고 풀 개 지옥 조금 잘하면 사람 또는 하늘 이렇게 해서 각각 여섯 세계가 있는데 그 여섯 세계를 자꾸 맵 돕니다. 꼭 지은 업에 따라서 업의 노예가 되어 업의 종속이 되어 자꾸 돌아다닙니다. 자기는 정신없이 여섯 세계로 돌아다닙니다.
  이러한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해탈의 삶을 얻게 하리라 하는 것이 바로 7입니다. 7은 해탈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바로 부처님의 생애가 정말 윤회에서 벗어난 삶을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걸 그 일곱 발자국에다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발자국 발자국에 연꽃이 피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인생의 고뇌는 시궁창 물과도 같습니다. 참으로 더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거리에서 뿌리한 연꽃은 이파리도 큽니다. 우산만큼 큽니다. 그런데다가 꽃이 또 아름답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부처님의 이 깨달으심은 부처님의 생애는 고역의 시궁창 속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애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홉 용이 물을 뿜었다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반드시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을 시킵니다. 목욕을 시키는데 누가 시키느냐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법신을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아홉이라고 하는 것은 팔방에다 중앙해서 구방을 말합니다. 사방팔방에서 구방 그게 전부 다 아닙니까? 우주 전체입니다.
  그 용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실 비를 내리는 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정수를 말합니다. 물의 근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깨끗한 우주 즉 진리의 기운 바로 이것에서 때 묻은 우리 중생계 속에 법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거룩한 생명의 성스러운 표현이기도 하고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두 줄기의 물 온수와 냉수는 천지의 조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축복받은 그런 표현 속에서 부처님의 생애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어떤 신앙이든지 어떤 종교든지 그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세계에서 거룩한 부처님의 탄생을 하나의 업신의 추진을 부처님이 성불하시기에는 정반왕이나 마야부인이라고 하는 두 남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의 업신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출생의 표현을 이렇게 우리 불자의 세계 불교의 신앙세계 또 불교의 문학세계 불교의 특유의 사상세계에서 그렇게 출현시킬 수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초과학입니다. 과학 그대로입니다. 과학이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과학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정신과학이 있습니다. 정신과학이 있으면 신앙과학도 있습니다. 그 신앙과학에서 나온 것이 바로 탄생의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