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의 원리 : 참선參禪하는 방법方法

禪의 原理

2009-11-19     관리자

1,자기의 참된 성품은 ? (주장자 三下)

오뉴월 삼복시절을 보내고 요즘은 청풍이 불어오고 있다. 그래서 고인(古人)네가 말씀하시기를

淸風柯而成三昧하고 明月渚而證證菩提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삼복고열에 더위를 이기지 못해서 고통을 받던 그 번뇌가 일시에 싹 가셔져 버리고 金風이 소슬할 때 그 마음이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고 나니까 달이 훤하게 비치는 거기서 보리를 증득했다는 말이다. 보리를 증득했다는 말은 자기 자성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독자여러분도 남녀노소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이 청풍도 똑같이 쏘이었으며 밝은 달도 똑같이 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자기의 참된 성품인가 한마디 일러보라.
악! (할)

蹴飜乾坤하고 手摩日月하야사 始得다.

(한 발로 지구를 차뒤집어 버리고 손으로는 저 일월을 만져야 비로소 자성을 깨우친다)

山移月不移하니 處處菩提座로다.
花笑佛顔紅하고 鳥啼聽法語러라.

(산을 옯??가도 달은 옮겨 가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자기의 진성처더라. 꽃이 웃으니 부처님 얼굴이 붉고 새가 우는데서 조사의 법어를 듣는다.)

2, 참선의 목적

여러분이 방금 본 글에서 알아챘으면 그 사람은 삼세제불 · 역대조사 ·선지식과 손을 마주 잡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그 법문을 알아 듣지 못했다고 한다면 부득불 잔소리를 해야겠다.

우리 한국불교는 선 · 교 양종으로 표현을 하는데 선이란 것은 내가 내 마음을 찾아서 곧 불지에 들어가는 것이요, 교란 것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을 배워야 옳은가 내가 내 마음을 찾아 가지고 부처가 되어야 하겠는가? 만일 말 잘하는 것이 부처라면 변호사는 전부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말을 아무리 잘해도 부처가 아니라 한다면 말을 배우기 보다는 선을 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의 꿈을 깨는 것이 근본이다. 생사가 어째 꿈이냐 눈뜨고 있는 지금 어떤 것이 나냐고 할 때 이 몸뚱이를 가르쳐 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 어떤 것이 나냐고 묻는다면 역시 꿈에 나타난 그 몸뚱이를 가리켜서 나라고 했지. 이것은 내가 아니고 저기 잠자고 있는 것이 나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잠자는 몸뚱이가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런데도 잠 안자는 한 물건이 있어서 산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며 희노애락을 역력히 느낀다. 생각해 보라. 꿈이다 현실이다 하는 환경은 다르지만 보고 들을 줄 아는 한 물건은 바로 이것이 꿈을 알고 현실을 아는 자체다. 만일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면 죽은 송장도 이목구비가 구족하니 역력히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도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를 지배하는 그 주인공이 역력히 보고 듣는 것이 틀림없다. 그 주인공을 언필칭 · 마음 · 영혼 · 넋 · 얼 · 주인공이다고 말을 하는데 그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을 깨우친 그때의 그사람은 바로 나고 죽는 꿈을 깬 부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꿈을 깰 수 있는가? 그 마음을 찾는 방법이 무엇인가? 거기는 조사스님께서 말씀하신 一,七OO칙이 있다. 그런데 오늘 읊은 게송에서 산은 옮겨가도 달은 옮겨가지 않는다는 것을 똑바로 꺠우치??그때에 조사의 一,七OO칙도 역시 똑같이 뚫어진다. 그러므로 팔만장경을 한권 한권 배우려면 무량겁을 두고 배워야 되지만 조사문중에서는 그렇게 배우지 않고 「산리월불리(山移月不移)」라는 이 한 글귀를 듣고 참구해서 깨우친 그때에 八만장경을 한번에 일러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조사의 종문중의 도리이다.

그런데 「산리월불리(山移月不移)」라 하니까 어렵다고 한다면 좀 더 쉬운 말로 일러줄 수 있는데 사물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한물건이 무엇인고? 여러분은 마음이라 대답할 줄 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 수도 없으니 허공이 아니겠느냐 하겠지만 여러분이 어디 가서 법문을 듣는다고 할 때 허공이 가서 들을 줄 알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허공은 아니다 또 그 자체를 깨우쳤으면 부처가 되었을텐데 자기를 회고해 보건대 분명히 부처는 아니고 중생이다. 그러니 부처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러면 그것이 물질인가? 물질이면 주고 받을 수가 있을텐데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때에 마음 · 부처 · 물질 · 허공도 아니라고 네가지로 부정하고 나면 「그러면 무얼까?」하며 의심이 안붙을 수가 없다.

3, 참선의 세 가지 요건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이 뭐꼬?」 분명히 들을 줄도 볼 줄도 아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생각할 때 세가지 요건이 있다. 즉 대분심(大憤心), 대발심(大發心), 대의심(大疑心)이다.

어째서 분심을 일으켜야 하느냐? 삼세제불 · 역대조사 ·시방보살과 천하 선지식이 입은 다르지만 「일체중생이 삼세제불과 추호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본래 중생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는 부처다. 그러나 내가 부처라는 말한마디 들었다 해서 부처가 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산을 오를 때 걸음이 빠른 사람은 빨리 도착할 것이요, 산만 쳐다보고 앉아서 가지 않는 사람은 한걸음도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자기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지 부처도, 조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날마다 돈을 수억만원 벌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진짜 이 우주 대보배를 체득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어째서 그러냐? 세상 황금을 태산같이 쌓아놔도 세상인연이 다하면 모두 소용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한다고 해봤던들 잠잘 때만 꿈이 아니라 낮에도 눈뜨고 꿈꾸는 것이 아니껬는가? 그래서 그 꿈을 깨기 위해서는 대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대용맹심은 왜 필요한가?

참선을 할 때 「이 뭐꼬」하고 五분 一O분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프고 허리 · 등 · 어깨가 아프다 그래서 살그머니 뒤로 빠져 요이불에 누우면 잠밖에 더 오겠는가? 그러니 이 몸뚱이는 도적놈이다. 어째서 도적인가? 눈으로는 좋은 것만 보고 싶어하고, 입으론 좋은 것만 먹고 싶어하는 등,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다 보니까 몸뚱이 이것이 참으로 난 줄로 착각하고 그래서 내 마음은 영원히 어두워져 버렸다. 그리고 이 몸뚬이가 아니더라도 우주 전체가 내 몸뚱이인 것을 알아야 한다. 六척의 몸뚱이 이것만이 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몸뚱이와 같이 지구 · 우주도 모두 지 · 수 ·화 ·풍 四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소아(小我)의 경지에서 살면 갖은 망상이 바다의 물결일듯 생겨나지만 우주전체를 내 몸뚱이로 볼 때엔 소아를 버릴 줄 안다. 소아만 버리면 대아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만다. 그래서 이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두둘겨 패가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 한번 두번 패면 아프다는 생각이 쑥 들어가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제가 제 손으로 뺨을 때리고 다리를 쥐어 박아라. 오히려 남이 때리는 것보다 외려 효과적이고 정신이 바짝 난다. 그래서 바로 대 용맹심이다.

그리고 어떻게 대의정을 일으켜야 되는가? 이 몸뚱이를 지배하는 주인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요, 자기 당처를 떠난 것이 아니다. 또 물건을 볼 때는 눈에서 나타나고 소리를 들을 때는 귀에서 나타나는 그 주인공, 마음 · 물질 · 허공 ·부처도 아닌데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라, 추우면 옷을 입어라 하고 역력히 행동하는 그 놈이 어떻게 생겼느냐. 긴가, 짧은가, 모난가, 둥근가, 검은가, 흰가, 어떻게생겼는가 할 때, 처음엔 초저녁에 밤길을 걷는것과 같다. 앞이 보이지 아니하여 허둥지둥 헤매고 고생이 심하다. 그러나 쉬지 아니하고 밤새 가다보면 오래지 아니해서 언젠가는 동이 트게 된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스스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그 길을 놓치지 아니하고 가다 보면 오래지 아니해서 해가 떠오른다. 해가 쑥 떠오르면 이 세계는 명랑한 세계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마음 찾는 것도 그와 같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도 걱정도 되고 하지만 화두를 지어갈 때에 잘되냐 못되냐 하는 것은 걱정말고 무조건 자기가 하지 아니하는 것만을 허물로 삼아야 한다. 하면 누구나 다 되지, 안되는 법은 없다. 안해서 안되는 것이지 해서 안되는 일은 없다.

寒水發火 幕不燒하고 石壁問聽 無不見을
靑天白日 周沙界하니 物物頭頭 格外身일러라.

그래서 이 몸뚱이 지배하는 그 주인공이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나에게 가까운 것인데 「이 뭐꼬?」하고 자꾸 의심하다 보면 의심이 뭉치고 뭉쳐서 얼음덩어리처럼 된다. 그것이 덩어리처럼 뭉쳐있다가 거기서 불이 확 일어난다. 불이 나면 이 몸뚱이도 타고 지구, 우주도 온통 타버린다. 얼음덩어리 속에서 불이 일어나면 이 세상에서 타지 않는 것이 없다. 저 삼각산이 바위 전체로 생겼지만 그 바위 전체에 눈이 뚫린다. 바위가 눈이 뚫리면 이 세상 만물 보지 않는 것이 없다. 푸른 하늘에 흰날이 훤히 비치면 이 세상에 안 비친 곳이 없다. 산이 높다고 더 비치거나 물이 깊다고 덜 비치지 않는다. 차별이 없이 절대 평등학 비친다. 그러니 물질 물질과 가지가지가 겁 밖에 새롭더라. 즉 의화(意火)가 충천해서 다 탔는데 한 생각 떡 일으키고 보니까 우주 삼라만상이 그대로 존재하더라. 이것이 바로 조사선 도리이다.

4, 참선의 방법

그리하여 깨우치면 좋은데 만일 그렇게 깨우치지 못하고 공부를 해봐도 잘 안될 땐 어떠한 방편을 써야 되느냐? 참선을 해보니 잘 안되고 어려서 부터의 온갖 망상이 들끓거든,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누르고 앉아 있으면 오히려 상기가 된다. 그러니 번뇌망상이 끓어 오르는 그때에는 저 마당이나 바깥 뜰에 나가 왔다갔다 하면서 화두를 챙겨라. 그러면 성성해진다. 그러면 또 다시 가서 살그머니 화두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대로 감ㄴ히 두호하고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또 망상이 들어오든지 혼침이나 잠이 오든지 하면 또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잠도 깨고 망상도 쫓아 버리고 성성하니 화두를 잡아가지고 또 가서 슬그머니 앉아서 참구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처음 공부는 익어가고 익은 망상은 스러진다. 이것이 공부가 익어가는 경로다. 혹자는 참선해보니 망상과 잠이 많아 안된다 하는데 이것은 방편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잠이 와도 벌떡 일어나고 망상이 와도 벌떡 일어서서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화두를 성성하게 챙겨라. 화두를 성성하게 챙기지 아니하는 까닭에 화두에 생각이 적고 망상과 잠자는데 마음이 치우쳐 있가 때문에 홛를 들면 화두는 간 곳 없고 망상과 잠이 가로 막는다. 그러나 틈을 두지 아니하고 자꾸 화두를 챙겨 보라. 화두를 자꾸 채이면 망상과 잠이 들오올 틈이 없다. 자꾸 챙기다 보면 그놈이 나중엔 가라고 해도 안간다. 그러다 화두가 자꾸 익어지면 화두를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저절로 화두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렇게 되가까지의 노력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이 정도되면 어떤 방편을 써야 하느냐? 「이 뭐꼬?」 생각할 때 내 마음으로 한생각 일으키기를 과거사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까 잊어버리고, 뒷일은 아직 다가오지 아니했으니까 그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딱 생각하면, 그만 앞뒤가 딱 끊어져 버린다. 앞디가 끊어져 버리면 당장에 공경지애에 들어간다. 앞뒤가 끊어져 버리면 공은 저절로 나타난다. 그렇게 공경지가 나타나면 화두를 떡 챙겨들고 생각하기를 앞뒤가 딱 끊어지는 그때에 다른 것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잊어버리고 잊어버린다는 생각까지 놓아버려라. 놓아버린다는 것까지 버려라, 그러면 성성적적한 광명이 확 들난다. 이렇게 되면 혹 어떤 사람은 평생 보지 못하던 광명이 오니까 그것을 견성이라하고 그만 내가 깨우쳤다고 하고 미쳐 나가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것은 깨우친 것이 나니고 식광(識光)이라는 것이다. 깨우쳤다 떠들다보면 몇일 있다 캄캄해진다.

그러니 성성적적한 영광이 훤히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때에 어쨋든 화두를 놓지 말고 주을판 살판 가면서도 「이 뭐꼬?」 밥먹으면서도 「이 뭐꼬?」자면서도「이 뭐꼬?」해야 한다. 이와 같이 되어지면 그때 화두 지어가는 의심과 이 몸뚱이와 우주 전체가 한덩어리가 이루어진다. 한 덩어리가 이루어지는 그때에 더 간절하게 「대체 이게 뭔고?」 하고 성성하게 밀밀면면하게 참으로 그때에 비로소 공부를지어가는 것이다. 이 몸뚱이가 죽고 살고는 놓아버리고 한바탕 밀고 들어가라. 그떼에는 죽어도 성취, 살아도 성취이다. 어째 죽어도 성취냐? 벌써 소소영영한 식광이 훤히 드러나는 그때에 화두를 들고가는 사람은 앉아서도 몸뚱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몸뚱이도 공해 버렸고 우주도 공해 버렸다. 공한 그 가운데서 다만 화두를 들고가는 그때인 까닭에 그 몸뚱이가 죽었다 하면 그대로 깨우친다.

그런데 행여 이 몸뚱이가 죽을까 싶어서 공포심이 나서 더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서서 「아이고, 아무리 해도 잘 안되고 항상 그 경계니 이거 어떻게 하느냐? 이거 잘 안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일으켰다면 그것을 자심마(自心魔)라고 한다. 즉 자심에게 일어나는 마군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애써서 들어가도 안되니 어쩌냐 생각하지 말고 공에 떨어질까 걱정하지 말고 그땐 공포심을 탁 놓고 「이젠 됐다. 내 이젠 죽어도 성취, 살아도 성취, 공부는 성취했다」 하며 아주 안심하고 밀고 들어가라. 그땐 곧 백지 한장 가려 놓은것처럼 자심의 알음알음 거리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때에 「이뭐꼬」자꾸 밀고 들어가면 그만 툭 터진다. 그때 깨우친 것이다. 그러면 그때가서는 천하 선지식과 부처님과 조사의 말도 거리낌 없이 활연히 들어가버리는 그때가 온다. 그러므로 밀고 들어가는 그 한생각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大地 眞金 未是珍이요
聖賢 尊貴 非我親을
滿目 乾坤 無寸草한데
曹溪山月 照膽寒일러라.

그래서 떡 깨쳐놓고 보니 우주 전체가 진금이라도 그게 보배가 아니요 성현이 존귀하나 나하고 최친자는 아니더라. 우주삼라만상 전체가 있기는 있어 허나 내 한가지도 취택할 것이 없다. 그러한데 조계산 저 달은 내 심담에 비춰서 밝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