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세계] 금강경(金剛經)의 사상

금강경의 세계

2009-11-13     김운학

  금강경은 600부의 대반야경 중에 제577부 대 반야 16회 제9회에 해당되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을 말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다. 범어 vajracchedika-paramita-sutra 에 의한 것으로 반야경 중 가장 간결하고 중심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제명(題名)의 뜻으로 보면 가장 굳은 금강석이 능히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반야의 지혜로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금강경이 그 만큼 모든 집착과 분별을 끊고 바라밀다 즉 피안에 이를 수 있는 절대적인 법을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강경은 그 내용이 약 300송(頌)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반야경」이라고도 하는데 그 성립기는 대개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불교 최초기로 보고 있다.
  그것은 이 경에 대승이나 소승과 같은 술어도 찾을 수 없고 또 이 경이 공(空) 사상을 설하고 있는데 내용 중에는 공이라는 술어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반야경과 달리 공의 용어가 확립되기 전에 성립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소승과 대승의 두 개념이 분명히 대립되기 전에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설법 회좌(會座)의 대중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고 원시경전과 같이 「1250인의 수행자와 같이」의 극히 간단한 형식을 쓰고 있으며 [다만 의정역에는 보살 중을 더하고 있다] 그 표현에 있어서도 대승의 정형적이 아닌 청신(淸新)한 사상감이 보이는 것 등을 종합해보면 역시 대승 사상 최초기에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금강경은 상좌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상층계급적인 것이 아니고 일반 서민적인 동산주부(東山住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법장부(法藏部)적인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이 경에 어떤 물질적인 공양보다 경의 독송의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일관해 있는 점 등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은 대승경전의 가장 초기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참신한 대표적인 경전이라 볼 수 있다.
  이 금강경이 구마라습에 의해서 처음 한역된 뒤 그것이 동양 삼국에서 가장 많이 독송된 경전중의 하나라는 것도 역시 이러한 점에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중국불교에서는 삼론(三論) 법상(法相) 화엄 천태 등의 제종은 물론 선종에서 특히 근본경전으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것은 이 경의 철학이 그만큼 깊고 밝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이 금강경의 내용은 어떠한가. 그 것이 공 사상이고 피안에 이를 수 있는 절대적인 사상임은 분명하지만 금강경에 이 내용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다음에 간단히 정리해 보자
  이것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이미 들고 있는 것처럼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체(體)오 삼으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요약해 보면 적합할 것이다.
  먼저 무상을 종으로 삼는다는 말은 법에는 어떤 모양도 없다고 하는 것이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것은 일단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철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 존재하는 것은 다 부정하는 철학이다. 부처님 자신이 수보리와의 대화 중 이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성상(聖像)이 되는 32상(相)도 그것이다. 결국 다 없음은 물론 아상(我相)도 없고 인상(人相)도 없으며 중생상(衆生相)도 수자상(壽者相)도 없다는 다시 나아가 법의 상도 없고 법상(法相)이 아니라는 것도 없다는 부정의 부정까지를 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유작용을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참다운 진실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존재를 인정하고 판단을 따른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높은 경지의 것일지라도 결국 상대적 유(有)의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그 가운데서 초월적 존재와 자아를 찾는 것이다.
  때문에 경의 내용에도 보면 모든 존재하는 모양은 다 허망하여 이것을 다 모양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참답게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진실은 존재의 것을 존재대로 보는데 있지 않고 그것이 허망하여 없는 것으로 보는데 바로 보는 이치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주함이 없는 것을(無住)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도 결국 존재와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무상(無相)의 철학 아래서 당연한 귀결이다.
  어느 곳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벌써 집착이 되어 진심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색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닿음 등에 주착(主着)해서 안 될 것임을 물론 정신적인 법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주장이다.
  즉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해가고 정신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흘러가 버리는 것인데 어는 곳에 주하고 머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주할 수도 없고 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반야의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금강경의 도리는 모든 것을 부정만 해 버리는 멸제(滅除)의 법에 그치는 것인가 그러나 금강경은 육조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부정의 가운데서 다시 존재를 인정하는 묘유(妙有)를 듣고 잇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든 일체의 존재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부처를 본다는 구절에서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나타나 있지만 항상 머무르지 않는 가운데서 마음을 쓴다는[應無所住而生起心] 구절에서 더욱 그 활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무(無)는 결코 완공(頑空)이 아니고 활공진공(活空眞空)으로 부정가운데서 존재를 긍정하는 법인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은 그 내용과 사상이 간단하면서도 불교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이 애송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그 내용이 집착과 분별을 배제시키는 적절한 철학으로 되어 있어 선종(禪宗)에서는 선리(禪理)의 종요로운 이론이 되어 일찍 육조 이후부터 선조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어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금강경은 참으로 가장 간단하고 깊은 소중한 경전이며 누구나 깊이 간직해야 될 경전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