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전등록

선전해설(禪典解說)

2009-11-08     관리자

  고의(故意)의 곡해(曲解)

 종밀은 의식적으로 마조선을 곡해한 경향이 있다. 의식적 곡해라는 표현이 온당하지 않으면, 극히 동기가 나쁘다고 말해도 좋다. 사물을 호의적으로 보는 면과 나쁘게 보는 양면이 있어서, 해석에 따라 천양지차가  있다. 종밀의 경우는, 확실히 「하택종」을 달마선의 제파 중 제일에 위치하려고 한, 종조인 신회(紳會) 이래의 끈질긴 의도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볼수 있다. 신회는 양경을 중심으로 정치적 움직임을 배경으로, 북종선 <선수파>을 배척하여 남종선 <6조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성공을 거두어 신회는 덕종의 정원(貞元) 12년(796), 정통 제 7조로서 국가의 공인을 얻었다.
그런데 곧 마조 · 석두(石頭) 두 사람의 문하 중, 마조의 홍주종이 남종 제일의 교세를 전개해 오므로, 북종을 배척한 하택종의 화살은 마조 · 석두 의 문하에 모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종밀이 활동한,  9 세기의 당나라는 국세가 점점 기울어져 외국의 침입, 절도사(節度使, 외교관), 환관(宦官, 小官)의 조량전황(조梁專潢), 반란의 족출(簇出)등의 우환이 잇따라 일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정계와 굳게 결속하고 정승적(政僧的) 세속적 움직임이 많았던 종밀이다.

 하택종의 남종 제일의 우위를 보지(保持)하려는 집념이, 종밀에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조의 선에 대한 종밀의 해석은 극히 동기가 나쁘다. 고의로 곡해하여 자종(自宗)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밀은 마조선의 가장 중대한 결함의 하나로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심(心), 특히 심(心)의 작용<用>인 불매(不昧)의 영지(靈知; 無念의 知見)에 대하여서는 명확한 교시가 없는 것을 들고있다. 즉 심(心)에 대하여서는 명확한 개념을 조금도 설시(說示)하지 않고, 그 개념의 외연적(外延的)인 것만 말하고, 외연적으로부터 심(心)의 개념을 추지(推知; 比量)시켜 비량현(比量顯)이라는 수법만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하택종은 현량현(現量顯)이라는 그것<心>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알리는 방법으로서, 심(心)과 중묘(衆妙)의 문(門)인「불매(不昧)의 영지(靈知)」등을 명확히 하고, 「즉심시불」,「망즉진(妄卽眞)」의 소식을 명쾌히 설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마조의 현량현이 있다는 사실을 고외로 무시한 것이다.
마조가 비량현적 수법을 많이 쓴것은 사실이다.  마조파의 제자 아류가 심(心)의 명확한 개념을 종밀에 엄중히 문책하니「언전불급(言詮不及)이므로, 말로써 설명하기 곤란하다」고 꽁무니를 뺐을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경향이 현대 학자가「도가 자연주의적 성분최다(道家自然主義的成最多)」라고 하는 까닭도 있겠다.
그러나 이 비량현적 수법이 많다는 것은, 불경계의 차원 높은 소식은 제시하여, 학인에게 돈오<一超直入如來地>를 강력히 권장하는「남종돈오(南宗頓悟)」라는 선의 기본적 접화법(接化法)이고, 반드시 비량현이라는 비판이 계당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더우기 마조가 현량현도 쓰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석문문 자선(石門文字禪)」등 수많은 저술을 남긴 임제종 황룡파의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ㅡ1128)은 종밀을 종장(宗匠, 고승)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이 마조계를 비롯하여 선문각파의 종지(宗旨)를 다시 차원이 낮은 것으로 해석하여, 자파만 높다고 한 태도에는「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고 통렬한 비난을 「임간록(林間錄)에 방서(停書)」하고 있다.

종밀이 말하는 선(禪) 삼종(三宗)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 본무(本無)의 망념 번뇌를 우선 실유(實有)로 보고 점진적으로 닦아<觀心> 이를 식면(息滅)하여 깨침에 도달하려는 선으로서, 신수계의 북종과 검남지선(劍南智侁, 5 조의 법사인 智詣을 말함) 보당무주(保唐無住 ㅡ 資州智詣ㅡ 資州處寂ㅡ益州無相ㅡ無住, 714~774, 이 계통을 保唐宗이라고 함) · 과랑(果랑) · 선부(宣付, 5 조의 사법)의 선을 들고 있다.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 제법개공에 철저하여, 일체를 민절멸진<부정>하고, 일법(一法)으로서의 기(寄, 據 ) 할 곳이 없다. 본래 무일물의 무사(無事, 作爲가 전혀 없는 것)의 경(境)에 주(住)함을 종지로 하는 선으로, 종밀은 석두회천(石頭希遷)이 계통과 경산도흠(徑山道欽, 法欽이라고도 함. 鶴林玄素의 법사, 714~792) 까지의 우두선을 이에 해당시키고 있다.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 제법이 곧 심성(心性)이라는것을 직시(直示)하여, 학인을 당장에 심성(心性)의 돈오를 강요하는 선으로, 마조계<洪州系>와 하택종을 들고 있다.

  비불비심(非佛非心)

 중이 마조에게 질문했다. 『스님, 왜 즉심즉불이라고 설하십니까?』
『의미(意味) 없는 편견망집에 가득 찬 그대들을 깨우치려고.』
『그러면 깨친 다음에는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즉심즉불도 비심비불도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어떻게 지시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불시물(不是物)이 라고 하면 되지 않아.』
『여기에 철저히 깨친 사람이 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엇을 깨쳤다는 놈에게 깨침은 없다. 다시금 그 놈에게 불법을 가르치리라.』

  선(禪)의 역설(逆說)

 역설은 말할 것 없이, 일반에서 인정하고 있는 견해와 는 전혀 역(거꾸로 된)인, 사람의 의표(意表)를 붙이는<付> 견해<命題>이다. 불교경전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마조 이후의 선종에서는 특히 눈에 띄었다. 더우기 후세의 선종에 있어서 상대의 의표를 붙이는 것만의, 역설을 위한 역설도 적지 않으나, 마조 시대의 역설에는 그런 것은 없었다.

 심원한 불법의 요체는, 보통 설하는 방법으로서는, 쉽게 표전(表詮, 이치를 발표한다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확고한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어디까지나 「진(眞)」을 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쓰여지고 있다.「비심비불(非心非佛)」,「불시물(不是物)」이 그것이고, 남악이 마조에 말한「좌선해도 어찌 불(佛)이 될 수 있으랴」의 일어(一語)도 그것이다.

「전등록」의 마조장(章)에는 다음과 같은 응수(應酬)도 있다.

 (1) 중 : 어떻게 도(道)에 계합할 수 있습니까?
      마조 : 내 일찌기 도에 계합한 일이 없어.

 (2) 마조 : 그대는 작불(作佛)하려고 한 일이 없는가?
      중 : 눈을 꼭 찍어도 <揑, 날조> 모르겠습니다<不解>.
      마조 : 나는 그대와 같지 못하다.
      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1) 은, 마조가 「일찌기 도에 계합하지 않았다」고 하여 중을 경계했지만 (2) 는, 마조가 그대는 작불(作佛) 하려고 한 일이 없는가라고 한 말에 중이 놀랐다. 작위 즉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마조의 저의(底意)는 진정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불법은 자연, 그대로라는 것을 암시한 말이다.
즉, 배고프면 먹고 곤하면 자고 하는 입장이라면 수행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중을 어디까지나 경계했던 것이다. (1) 에서 마조의 말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의 뜻 ㅡ 합도(合道)는 도(道, )에 계당하는 것이고 (2) 는 중의 말이 「비심비불(非心非佛)」어느 편도, 심(心) · 불(佛)의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역설에 의하여, 상대에 심 · 불(心 ·佛)을 완전 파악시키려는 것이 그의 정신이다. 마조의 역설은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마조(馬祖)와 석두(石頭)

 등은봉(鄧隱峯)이 마조에게 사거(辭去)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니 마조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가.』
『석두에게 갑나다.』
『석두스님의 선풍은 평이한 듯하나 깊이가 있어서, 얕보면 도리어 일갈(一喝)을 당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반드시 석두의 종지를 회득하고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등은봉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떠났다. 석두의 암자에 도착하여 은봉은 여장도 풀지 않고 석두스님 앞에 나아갔다. 다짜고짜로 그의 선상(禪床)을 한번 돌더니,석장(錫杖)을 휘두르고 환(鐶, 고리)을 크게 울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어떤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석두는 무언가 가엾다는 듯이 소리를 내면서, 「아아, 슬프다. 슬프다」라고 했다. 이에 은봉은 놀랐다. 생각치 못한 일이기에 한 마디 대꾸도 못했다. 은봉이 헛수고하고 되돌아 와서, 마조에게 사실을 고했다.
마조가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한 번 더 석두에게 갔다 오너라. 전과 같은 말로 석두가「아아, 슬프다」고 하면, 너는 누워서 코를 골아 보여라.』

 은봉은 다시 석두에게 가서, 전과 같이 행동하고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석두는 곧 코 골며 앉은 잠을 들고 있었다. 선수(先手)를 당한 은봉은 또 한 마디도 말 못하고 되돌아 오니 마조가 말했다.

『석두의 노활(路滑, 路는 종지(宗旨)고 滑은 미끄럽다는 말) 함이다. 석두의 선풍은 쉬운 듯 하나, 깊이가 있다 고 하지 않았나.』

  달마선의 새롭고 특이한 선풍

 일반에서는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을 선의 문답같다고 한다. 위에서 마조, 은봉, 석두 세사람의 문답이 바로 그런 것이다.

 문답의 착안점은,「간목신(竿木身)에 따르고, 장(場)에 봉(逢)하여 戱)를 작(作)한다」는 일구(一句) 이다.
 즉,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오득하고. 더욱 그를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초탈한 광달무애(曠達無礙) 한 선객의 자유자재한 경애가 주제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하여, 은봉이 석두를 시험해 보려고 마조에게 다녀오겠다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선가에서는 조실스님이 확인을 변험(弁驗, 상대의 역량, 경계 등을 알아 보는 것) 하는 것만 아니라, 학인도 조실스님을 스승으로서 섬길 가치가 있나 없나를 알기 위하여 변험하는 경우도 많다. 이 은봉의 경우는, 석두가 스승으로 적당한가 아닌가의 변험이 아니고, 이미 수행을 필한 그가 견문을 넓히기 위한 변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은봉의 변험은 모두 실패했다. 즉, 곧장 석두의 선상(禪床)을 한 바퀴 돌고, 석(錫)을 요란히 흔들어 「이 어떤 종지인고」하고 대들었지만 미리 「석두 노활(石頭路滑)하다」고 일러준 마조의 불안이 적중하여, 은봉은 석두의 기묘한 대답에 절구(絶句)하고 말았다. 간목(竿木, 非心非佛, 참다운 깨침)이 몸에 익지 않았고, 장(場, 석두와의 相見)에 봉(逢)하여 자재로히 희(戱, 應接)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조가 가르쳐 주었다. 「석두가 아아, 슬프다 슬프다 <倉天 倉天> 라고 말하면 코 골면서 앉은 잠을 자라」고, 석두는 은봉이 다시 자기를 변험하려고 온뜻을 알고 선수를 써서 앉아 잠자는 척 하였다.

여기서 마조가 은봉을 비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직 광달(曠達)의 경계에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활(滑) 한 석두의 노(路) 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즉「비심비불(非心非佛)」, 「번뇌 즉보리(煩惱卽菩提)」의 무애자재의 경애에 은봉은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러니까 석두와 은봉은 그 도력의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석두가 선수를 쓴 것은 좋으나 은봉이 석두에게 선수를 삣겼다 하더라도 무언가 응수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일구반구의 대꾸없이 돌아 섰다는 것은 선객으로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의 문답은 맞고 안 맞고가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게 소신이 있으면 된다. 결국 석두는 혜안(慧眼)이 있어서 선수했던 것이다.



✻ 註

 비심비불(非心非佛) : 즉심시불의 역설. 불법의 요체는, 즉심시불이라고 하지만 이를 강하게 의식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면 도리어「진(眞)」을 상실한다는 배려에서 나온 말로서, 심(心, 佛)에 계당한다면, 다시 그것을 초탈하라는 뜻이다.

 불시물(不是物) : 물(物)은 심(心)의 뜻으로, 후에 선가에는 「일물(一物)」.「일보(一寶)」라고도 했다.

 석두로활(石頭路滑) : 석두스님의 종지(宗旨)는 평이한 것 같지만 깊이가 있다. 쉽게 알았다가는 다리가 부러져 미끄러지게 된다. 이와 같은 뜻의 교계(敎誡)의 말이다.

 간목신수 장봉희작(竿木身隨 場逢戱作) : 종지에 계당된, 조실스님과의 응수 또는 일상의 기거언동 일체가 임기응변 자유자재하다는 뜻이다. 간목은 마술사가 쓰는 작대기로, 그들은 이를 수족처럼 써서 가두에서 연기하는 고사(故事)에 의한 것이고, 장은 연기를 출연하는 장면을 말한다.

 선상(禪床) : 선상(禪牀)이라고도 한다. ① 승당<좌선당, 선당>안에 앉는 자리. ② 승당 내의, 조실스님만이 좌선하는 의자를 말한다.

 종지(宗旨) : 신봉(信奉)하는 가르침의 취지. 한 종파의 근본이념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