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과 인간성] (7) 제 6의 식

심층교학해설 - 유식학과 인간성(7)

2009-10-21     오형근

독산의식(獨散意識)

다음에는 독산의식(獨散意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산의식은 평소의 의식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른 심식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헤매는 것을 뜻한다. 단독으로 헤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상실하고 인식의 대상<法境>과도 일치시키지 못하며 방탕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 때의 의식은 산만하고 분열된 현상을 보이며 정처없이 밖을 향하여 달려 가려는 산란심소(散亂心所)를 야기하게 된다.

심소(心所)는 의식의 체(體)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에 소속된 작용을 말한 것으로 이러한 독산의식은 산란하여 흩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암기력(暗記力)이 없어지게 된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여 산란의식(散亂意識) 이라고도 명칭한다. 이와같이 의식이 극도로 정상을 잃고 산만하게 되면 비정상의식으로 변하게 되며 결국 광식(狂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 때의 광식은 사실을 곡해하는 전도(顚倒) 된 마음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를 미쳤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눈병이 난 사람이 푸른 하늘을 누렇게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착각과 환각을 야기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경우를 비량심(非量心)이라고 도 한다. 즉 그릇되게 인식을 하는 마음을 뜻한다. 의식의 인식 내용을 세 가지로 구별하여 말한다. 그것을 삼량(三量)이라 하는데 양(量)이라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양탁(量度)이라고 하며 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삼량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현량(現量)이요, 둘째는 비량(比量)이며 셋째는 비량(非量)등의 내용으로 구별한다. 현량은 앞에 놓여있는 사물을 틀림없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엇이나 틀림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량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량은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간혹 틀리게 인식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예를 들면 담장 너머에 뿔이 보였을 때 이를 추리하여 소가 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반면에 소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소와 비슷한 뿔을 가진 또 다른 동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먼 곳에 연기가 보일 때 그곳에는 불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량(比量)은 간혹 틀릴 수 있는 인식의 내용을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사를 그릇되게 판단하는 인식의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인식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산란의식은 비량의 인식을 파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여 산란심을 없애는 정신생활이 매우 긴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제육의식에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는 별명이 있다. 정중의식은 마음의 안정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산란의식과 같은 마음을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정(禪定) 가운데 유지되는 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입정(入定) 가운데 나타나는 지혜로운 마음을 정중의식이라 한다.

여기서 정(定)이라는 말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은 경지<不動心>를 말하며 또한 산란하지 않은 마음<不亂心>의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마음은 마음을 요란케 하고 분열시키며 지혜의 활동을 장애하는 번뇌(煩惱)를 정화한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에서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定)의 뜻을 심일경성(心一境性) 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과 대상이 하나가 된 경지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는 마음에 한 점의 잡념도 없고 번뇌가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과 인식의 대상 사이에 끼어서인식의 장애를 부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상과 같이 정중의식(定中意識)은 마음이 가장 잘 정화된 청정심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말한다. 이 의식에는 오직 진리만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열(禪悅)과 법열(法悅)에 해당하는 희열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심식을 말하여 무분별식(無分別識) 또는 무차별심(無差別心)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통일되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평등심만이 나타날 뿐이며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나타날 뿐이며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나타난 심일경성(心一境性)이기 때문에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중의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모든 대상<法相>은 그 실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경지를 증득(證得)이라 한다.

증(證)이라는 말은 경계(境界)가 없다는 뜻으로서 합일(合一)의 경지를 뜻한다. 이는 곧 각(覺)과도 통한다. 모든 대상<法境>을 진리롭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깨닫는 경지는 피차(彼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피차가 없는 하나의 경지에서 체득하고 득입(得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 모습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체(法體)가 지닌 체성(體性)까지도 인식된다. 이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정중의식인 것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번뇌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유로우며 고통이 없고 편안한 열반(涅槃)의 경지만이 있을 뿐이다.

번뇌현상과 산란의식

이상으로 제육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제육의식은 우리 인간의 심식(心識)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며 우리 생활의 전부를 결정하는 정신이다. 때로는 눈, 귀, 코, 혀, 몸 등 오관<五根>을 통하여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객관세게<六境>를 인식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의 역할을 하고, 또 대내적으로는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추측하며 계획도 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몽중의식(夢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이와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廳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 가운데서 가장 넓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역할을 하는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은 이들의 의식생활이 핵심이 되며 의식생활 여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하고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중의식의 생활화이다.

현대인의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 주는 주체는 곧 정중의식 뿐이며 동시에 복잡한 산업시대에 잡념과 망상을 극복하고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까지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정중의식의 생활화 뿐인 것이다.

이제 정중의식에 의하여 정화되는 대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위에서 소개한 산란의식이며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육의식을 산란케 하는 것은 곧 번뇌이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번뇌를 야기하는 근원은 제육의식이 아니라 제칠 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고 한다.

이 말나식이 진리를 망각하여 비진리적인 번뇌망상을 야기하며 제육의식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제칠말나식을 설명할 때 다루기로 하고 제육의식 자체에도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나식 만큼 근원적인 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번뇌는 오히려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이 제육의식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정신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제육의식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산란의식의 상태가 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곧 정중의식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지혜를 방해하고 의식을 흐리게 하여 불행한 업력만 조성하는 정신작용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진리를 망각하여 진리로운 가치관을 상실한 채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는 무명(無明)이 있게 되는데 이는 의식의 행위를 그릇되게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집은 무아(無我)의 경지인 순수한 자아를 집착하여 끝없는 이기심을 나타내는 근원이 되며, 법집은 모든 사물의 진실성을 망각하고 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끝없이 소유욕(所有慾)을 나타내며 온갖 악행(惡行)을 유도하는 근원이 된다. 이들 탐심이 앞서니까 자신의 의식에 거슬리면 즉각 진심(瞋心)을 내며 또한 자기만을 제일이라는 아만(我慢)을 나타낸다. 이러한 마음들은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는 정신작용들이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들은 남을 멸시하고 질투하며, 한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을 속이며, 동시에 자기 이익을 위하여는 아첨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한다.

이와같이 아집과 법집에 의하여 나타나는 의식은 뚜렷한 진리관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놀고, 방탕하는 것이 행복인냥 착각한다. 동시에 게으른 마음과 방종하는 마음을 갖고 세월을 허송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첨(無慚)과 무괴(無愧)라는 마음으로 반성과 참회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에 가로막힌 의식은 항상 혼침(惛沈)과 흔들리는 도거(掉擧)의 마음을 중심하여 산란하고 침체된 의식 속에서 악업(惡業)만 조성하게 되다.

이상과 같은 의식 작용들을 유식학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수번뇌(隨煩惱)라고 부른다. 번뇌는 곧 악(惡)이라고 표현하며 악은 또 고통과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모든 의식의 번뇌현상은 죄업에 불과하다. 이는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통한 살생(殺生)등 십악업(十惡業)과 불살생(不殺生)등 십선업(十善業)과는 매우 다른 심리적인 것이다.

이상으로 제육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의 현상 그리고 산란 의식적인 내용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의식생활은 각자의 수행력에 의하여 정화되며 정화된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이 정중의식은 선업(善業)의 핵심이 되며 위에서 말한 번뇌의식과 는 달리 모든 생활을 밝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정(定)에서 나타나는 의식은 모든 진리를 확신하는 지혜를 동반하며 그 생활을 열반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오형근   1932.8.3. 경북옥포출생.  동국대학교 박사 과정수료. 현재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