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 수기 <15> 라사의 위기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9-10-21     달라이 라마

제 10장 라사의 위기

1959년 3월 1일 라사의 큰 절에서 나의 한 단계 기말고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종교적 교육은 계속됐고 나 개인은 평화롭게 신앙에만 전념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분위기는 굉장했고 이번 시험은 개인이나 국가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행사가 한창인데 장성이 보냈다는 중공군 장교가 나타나 중공군 부대에서 공연할 연극 구경을 언제 오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장은 대답을 못해도 이 행사가 10일 안에 끝나니 그 때 날짜를 잡겠다고 했다.

장교는 당장 정하라고 고집했고, 나도 행사나 끝내자고 우기며 그 정도로 장성에게 전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방문이 기묘했다. 보통장성이 직접 오거나 우리 정부를 통한 격식이었는데 모두 이례적인 젊은 장교에다가 의심을 품고 내사해왔다. 의도적으로 달라이 라마의 품격을 격하시키는 처사에 분노도 했다. 나로선 초대거절로 야기될 피해 때문에 좋든지 싫든지 참석해야 하는 신세가 처량했다. 하찮은 일이라면 침소봉대전에 응해 주는 습관으로 지냈다.

같은 달 5월 행사가 끝나고 시가 행진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중공군도 참석했는데 올해는 안보였다. 이틀 후 장성의 전화가 통역을 시켜 언제 부대로 오겠냐고 물었다. 그것에 대한 우리측 대답은 10일이었다. 9일 아침8시 중공군 장교가 와서 나의 호위대장을 중공군 사령부로 가자고 했다. 호위대장은 조반전이니 10시에 간다고 했다.

장교는 돌아갔다가 한 시간 후 다시 오자 즉시 가자고 데려갔다. 호위대장이 중공군 사령부에 다녀온 뒤 사람들이 나에게 보냈다. 내일 연극구경 오는 다라이 라마 때문에 불렀다고 화를 냈고, 날짜가 정해졌냐니 그것도 모르냐니 너희들 식으로 행치는 못한다. 경호도 무장해제라 티??군인은 중공부대밖에 대기하고 꼭 필요하다면 비무장 두서넛 허락한다. 중공군은 내가 있는 궁밖 2마일까지 진을 쳤단다. 통상 달라이 라마 행차는 25명의 호위가 따르고 연도에는 군인들이 배치된다.

그런데 비무장 경호에다 혼자 중공군 사령부로 간다면 큰 소요를 초래할 일이라니 누가 달라이 라마를 저격하면 책임지겠냐 우리도 비무장으로 경호할테니 걱정말고 너희군인을 부대 영문밖에 배치하고 싶으면 맘대로 하되 일체 비밀로 알고 있으라고 했단다.

어쩐지 수상하다는 의견들이었다. 별궁에서 중공군 부대까지 몰래 간다는 방법은 일체의 통금을 시키면 가능할까 될 수 없는 초청이었다. 내가 움직인다는 소리만 나면 라사는 떠들썩하고 시민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특히 며칠전 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라사에 모여 있다. 동부 피난민까지 합치면 라사인구로 처음인 십만을 넘게 된다.

이러나 저러나 9일 오후 경찰을 통하여 내일은 교통제한이 있다고 예고했다. 이 소문이 달라이 라마가 주공군에 납치당한다고 퍼져서 저녁때부터 동요가 일고 이튿날 아침에는 온 시민이 중공군 사령부 방문 결사반대에 나섰다. 사람들이 믿을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다음 달 북경에서 소집되는 전당대회에 나를 보내려고 압력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나도 초청 거절에 대한 확답을 못하고 있는데 일주일전 북경서 일방적으로 나의 참석을 공표 했다.

그보다도 동부의 고승들이 초청 받았다가 돌아온 적이 없는 예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시민들의 동태를 정부에서 알게 했다. 통상 정부고관도 초청했었는데 이번엔 나의 개인수행만 허락했다. 저녁 때 전달된 초청장은 정부고관 6명 뿐이었다.

또 구두로 고관은 시종 한 사람만 데리고 올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공식수행은 전부 초청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고관들이 나를 호위하기로 한다. 3월10일 정오, 전례없는 나의 중공군부대 방문이 시작될 무렵 라사에서도 유례없는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5시 기상 예불 기도할 때까지는 정상이었다. 장명등도 밝았고 다기도 새로 채운 물이 그릇 빛깔로 금의 액체처럼 보였다.

향도 은은하고 입선 후 방선 마당에 내려와 포행도 했다. 봄 날 아침 하늘은 구름도 없었다. 먼 절의 뒷산 봉우리로 해가 돋으며 별궁채 지붕도 아름다운 빛을 냈다. 풀과 나무는 새봄에 새싹이 나오고 연못의 연은 해를 감싸려는 듯 그 쪽으로 잎을 폈다. 모든 푸르름은 나의 색상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래서 나의 염불 깃발도 푸른색이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터졌다. 사람을 불러서 알아보라고 했더니 시민들이 별궁을 에워싸고 나를 중공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보호하러 왔는데 3만도 더 될 것이란다. 나는 제 7대 달라이 라마가 창건한 기도처에 갔다. 이곳에는 8명의 승려가 계속 기도 정진 중이라 나는 동참했다.

9시에 중공군 차가 우리 고관 2명을 태우고 나타났다. 다음 차에 중공군 호위가 보이자 나를 데리러 온 줄 알고 돌이 날라갔다. 동승한 우리 정부 관리는 맞아서 실신하고 차는 대파됐다. 나중에 동료인 줄 알자 인도 영사관 병원으로 옮겼다. 또 한명은 걸어서 시민 속을 헤치고 나타났다. 아직 한 명이 모이지 않았는데 그는 직접 중공군 사령부로 가서 나오지 못했다. 시민의 결의는 내가 중공군 부대로 못가게 했단다. 육칠십명의 대표도 선임하고 이들의 지휘하에 나의 납치방지 경계임무까지 배치했다.

중공군은 물러가고 티벹??티??사람에게라는 구호도 들려왔다. 그들처럼 태어나고 그들처럼 느끼고 현재 겉잡지 못하는 감정도 같다. 결국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생겼다, 이 사람은 공군과 연락하는 소임인데 아침 예불 뒤 11시경 자전거로 별궁 쪽에 오고 있었다. 먼지를 막으려고 안경에 마스크를 쓴 것이 중공군이 변장했다고 단정한 결과다.

나는 중공군도 우리 쪽으로 오지 말라고 연락했다. 또 행사도 참석할 수 없게 됐으니 양해하라고 그 쪽 통역에게 전했다. 시민대표 에게도 안가겠다고 전했다. 그 결과를 확성기로 말하니 시민들은 환호했다. 아침에 당한 긴장은 내가 통치자로서 당한 처음이었다. 마치 곧 터질 두 활화산 틈에 끼인 것 같았다.

한 쪽 침략군이다. 둘이 부딪치면 뻔한 끝장이다. 라사는 몰살이고 티??전토는 폭군의 탄압밑이다. 이제 문제는 무슨 수단을 쓰든 내가 나서야 한다. 중공군 부대로 안간다면 끝날줄 알았는데 시민들은 앞으로 절대방문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야 해산한다고 버티었다. 그들의 대표들에게 수락했으나 시민들은 남아 있었다.

오후 1시 고관 3명에게 전해져 설명을 중공군에게 해주라고 내보내니 시민들은 나도 뒤따르니 또 동요하기 시작했다. 누누이 설명해도 시민들은 자동차 검문검색을 거쳐 통과시켰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경비대를 조직하고 궁을 수비했다. 우리정부는 하지 못하게 했으나 듣지 않았다.<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