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단] 고봉스님의 수행 - 선요(禪要)를 중심으로

[지상강단] 선요(禪要) 2 - 高峰스님의 수행ㅡ선요(禪要)를 중심으로ㅡ

2009-10-21     지오 스님

[전호에서 계속]

이러한 내용을 볼 때 묵조선의 정(靜)만이 아니고 동(動)과 정(靜)을 초월한 깨달음인 것이다. 정은 근본이고 오(悟)는 지엽(枝葉)이라는 묵조선 축의 주장은 본(本)을 전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묵조선 의정과 깨달음의 순서를 깨달음과정의 순서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혜선사도 무조건 정좌를 배척한 것은 아니고, 정좌법이 몸과 마음을 게으르게 하지 않는 효과가 있음은 인정하지만 수행상의 차이에 배척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대혜선사의 입장이 깨달음을 첫째로 하고 그것이 현실의 시끄러운 곳에서도 공부를 짓는다는 것이 확립된 점이 분명하다.

[3] 지리, 문화 ,정치적인 영향

중국 송(宋)나라는 한(漢)나라 와 당(唐)나라에 비해서는 정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나라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사상적 예술이 발달했고, 지리적으로는 현저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남송(南宋)이 일어남으로 해서 중국의 인구는 대부분 남방으로 이주했으며, 문화권도 역시 인구 밀도가 많은 남방에서 팽창되게 된 것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남송의 정치아래 모든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 발전되었고 남송의 영향을 받은 인접 지방들도 남송의 경제, 문화, 사상, 정치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정치, 문화, 사상 등의 모든 면에서 안정을 다진 남송에서 고봉(高峰)스님이 태어났으며, 성장하여 활동하신 곳도 바로 이곳이다. 고봉스님이 태어난 곳은 강소성(江蘇省) 소주부(蘇州部) 오강현(吳江縣)인데, 지금의 상해(上海)에서 80km떨어진 거리이고, 성장하여 주로 머물러 계셨던 곳은 임안(臨安), 갱주(坑州)인데 임안과의 거리는 100km떨어진 거리였다.

임안은 1138년에 남송의 수도로 정해지고부터 멸망하기까지 임안이 중국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좋은 조건이 갖추어진 나라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고봉스님은 불법(佛法)을 배우기 위하여 복건성(福建省) 건녕(建寧)에 있는 밀인사(密印寺)에 출가한 시기만을 제외하고는 문화, 정치 등의 중심지인 임안을 벗어나 생활한 적이 거의 없으니, 이러한 좋은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고봉스님이 계셨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외적(外的)인 영향이 자신의 수행상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선요(禪要)의 저자인 고봉스님은 남송 말기인 1238년부터 원(元)나라 초기인 1295년 초까지 생존하신 분이시다. 고봉스님이 생존해 계시던 이 당시의 사회적 변혁은 전쟁으로 말할 수 없이 혼란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북방의 이민족들이 세운 금(金)나라의 정치, 군사적 압력에 못 견디어 남하(南下)한 이후의 송이기 때문에 남송이라 한다.

남송은 금나라와 항상 적대감으로 많은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남송의 국력이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1234년에 무적을 자랑하며 싸우던 금나라가 몽고에 의해 망했으니, 금나라가 망한 4년 후에 고봉스님이 출생했다. 금나라가 몽고에게 망했지만 몽고도 역시 국력의 신장과 영토 확충을 위해서 금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남소을 괴롭혔기 때문에 국력이 약한 남송은 하는 수없이 1259년에 몽고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가 바로 고봉스님이 삼년사한(三年死限)을 세우고 정진수도를 하시던 시기이다.

또 1273년에는 몽고병들에 의해 양양(養陽)과 번성(樊城)의 두 도시가 함락 되었으니, 이 때 고봉스님은 임안의 용수사(龍鬚寺)에서 정진 수행중이었다. 1276년에 몽고 군대는 양자강을 건너 갱주에 진입하여 도성을 점령하고 황제를 체포했으니, 이 해에 고봉스님은 무강(武康)의 쌍계봉(雙계峯)에 주석하시면서 정진하시는데, 몽고 군대가 쳐들어오니 고봉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학인 제자들은 몽고 군사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고봉스님은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시고 몸을 단정히 하시어 태연히 정진했다고 한다. 1279년에는 송나라가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는데, 이 해에 고봉스님은 5년 동안을 두문불출하고 계시던 쌍계봉을 떠나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峯)에 들어가시어 사관(死關)을 맺고 일생을 마치게 된다.

[4]고봉스님의 수행

고봉스님의 출가 초기 6년간은 사한(死限)을 맺기 전에 교학을 의지해서 수행했던 기간이므로, 이 때는 천태교(天台敎)를 수습하던 시기였으며, 다음 5년간은 정진 수도에 전심전력하던 시기이므로 이 때를 사한 기간으로 하고, 그 다음 18년간은 용수사와 쌍계사 등을 중심으로 만행하면서 사한 기간 동안 경험했던 수행상의 경지를 더욱 더 종진하면서 더 한층 노력한 시기였으며 이후로 마지막 입적할 때 까지는 사관(死關)을 맺은 시기로 수행의 기간을 분류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봉스님의 출가 이후의 일생을 대략 분류 해 볼 때 고봉스님 스스로를 위하여 개인적인 수행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 수행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또 고봉스님께서 수행에 매진하고 있을 때는 어떠한 반연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반연에 끌리지 않고 수행하신 흔적이 상게서(上揭書)에 보인다.

3년동안 죽기를 맹세하고 참선공를 하는데 어느 날 부모 형제가 찾아 왔으나 단정한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정진하면서 부모형제의 반연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을 볼 때 고봉스님은 자신의 내적(內的)인 수행정진에는 조금도 인색함이 없이 했으나, 외적(外的)인 면으로 볼 때는 조금 미진함이 없지 않았다고 하겠다.

고봉스님께서 당시 정치, 문화, 사회, 지리적 조건의 중심지였던 곳에서, 수도생활을 하셨던 분이 사회의 급변속에 조금은 영향을 끼쳤을 만도한데 그러한 근거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것만을 보더라도 고봉스님의 행적 전체는 주로 자신의 수도 생활에만 전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후인(後人)들이 고봉스님을 두고 한말이 있다. 그것은 상게서에「師有厭世之心」이라는말이니, 이것은 세상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이 있었으니, 이 말을 보더라도 고봉스님은 전쟁으로 혼란한 사회와 야합하는 것보다는 진정한 삶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성격상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봉스님은 세속과의 많은 대화와 접촉을 피해가면서 자신이 수행에만 진실했기 때문에 후세에 끼친 영향은 대단치가 않다고 본다. 고봉스님과 대조를 이루는 스님이 있으니,그는 대혜스님이다. 대혜스님도 같은 임제문하의 법손이며 고봉의 선배이지만 대혜스님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풍을 날리면서 사회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면서 사회를 기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사회의 보다 나은 발전을 기하는데 참여하는 자세를 보여 역사적 변천의 현실 속에서 선풍을 깊이 뿌리내릴 수 있게 한 대혜스님의 선심(禪心)을 지금도 동남아 불교국에서는 불사신(不死身)의 선사상으로 풀이되고 있지만, 고봉스님의 선풍은 자신의 수행에만 전력하고 외적(外的)으로 사회에 기여한 면이 적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볼 때 고봉스님의 제자인 천목중봉(天目中峰) 스님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호구파(虎丘派)의 명맥을 유지해준 것은 소륭(紹隆)의 힘이라기 보다는 원대(元代) 초두(初頭)의 그 파에서 나온 천목중봉스님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래서 대혜스님과 중봉스님은 명인(明人)이라는 칭호가 있다. 고봉스님은 자신의 수행 외에는 마음을 기울여 전념한 일이 학인들을 지도한 것이 제일 큰 것일 것이다. 옛부터 지금까지 모든 눈푸른 선사들이 납자(衲子)들에게 화두를 제시할 적에는 대다수가 본인이 직접 참구했던 화두를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봉스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봉스님의 저서인 선요(禪要)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고봉스님 본인이 참구하던 ‘萬法歸一ㅡ歸何處’ 의 화두를 재가신도인 신옹거사(信翁居士)에게 제시하는 것이 나타나고, 또 개당보설{開堂普說}에서도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고봉스님은 화두에 대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술해(述解)하시는 부분도 많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고봉스님은 본인이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후학들에게 지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고봉스님 본인 스스로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자기 자신의 경험을 근간으로 하여 모든 후학들에게 지도하는 방법은 고봉스님의 장점이지만, 일상생활상에 있어서 선행(禪行)의 응용이니 사상적인 영향은 없고, 그 반면에 수행상의 실참실오(實參實悟)하는데는 여지가 없다. 그래서 고봉스님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실참실오만을 강조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또 고봉스님의 엄정한 계율에 대한 것은 여러가지의 자료를 보더라도 대단히 엄정하게 나타나 있다. 가끔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출가한 본래의 뜻을 망각하고 한결같이 삿된것과 악만을 따르노라,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함부로 부처님과 조사들의 공안만을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써 전해주며, 밀밀히 보배처럼 잘 간직하는 것으로써 극칙을 삼고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인과를 부인하며 너와 나를 다투는 소견만 더욱 늘고 탐,진,치,삼독 만을 치성하게 하니, 이러한 무리들은 마군들이 있는 곳이나 외도에 떨어져서 영원히 그들의 권속이 될 것이다.

이와같이 고봉스님께서는 후학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무서운 경책의 말씀을 지도 이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고봉스님의 엄격한 계율관에 대한 문구가 스님의 탑명(塔銘)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尤矜細行 崇戒律」또 고봉스님께서 본인이 직접 수행상으로 경험하셨던 것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학인들에게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3관(三關)의 내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大徹底人 本脫生死 因甚不斷 命限,
佛祖公案 只是一個道理 因甚 有明不明,
大修行人 當尊佛行因甚 不學毘尼 」

이상의 3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불법문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고봉스님의 엄격하셨던 계율사상이 바로 선(禪)이라는 수행에 뿌리를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반신자들에게도 부처님의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내용이 고봉스님의 행장(行狀)과 탑명(塔銘)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그 내용인 즉 고봉스님에게 수계한 사람이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수만에 달한다고 했다.

또 고봉스님의 특이한 계율 형태가 있으니, 그것은 선적(禪的)인 내용으로 변형되어 있음도 알 수 있으므로, 그 내용은 많은 계율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변용하여 실천하셨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고봉스님의 시도삼계(示徒三戒)이니, 그 내용은‘상게서’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아래에 인용해 본다.

開口動舌 無益於人 戒之莫言(口)
擧心動念 無益於人 戒之莫起(意)
擧足動步 無益於人 戒指莫行(身)

이상에서 말한 이것이 바로 고봉스님의 계율관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고봉스님은 계율의 내용을 3가지로 간단하게 말씀하셨지만 이 내용이 신(身, 戒之莫行) ,구(口, 戒之莫言), 의(意, 戒之莫起)의 3업(業)을 분명하게 밝혀 보이신 것이며,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수행(禪修行)에 없어서는 안 될 말씀이다. 그래서 고봉스님은 틀에 박힌듯한 고정된 계율만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포용력 있게 부처님의 계율을 실제 수행상에 필요한 부분적 내용으로 합리화 시켜서 계율의 근간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고봉스님이 계율사상은 개인적인 방면으로 볼 때는 부처님의 율행(律行)을 그대로 행하시려고 애썼던면이 있고, 또 계율이 선수행의 실제적인 방면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을 조명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봉스님의 계율사상은 「상게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師猊淸古體修律」이라는 말이 제일 적당한 계율사상의 일구(一句)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