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화

바라밀 교학강좌(2) - 진리이신 부처님

2009-10-12     관리자
법화사상의 기본 이념
1.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명
드르마푼다리카슈드라(Sad-dharma-Pundarika-Sutra)는 묘법연화경을 가리키는 인도 샨스클스트어입니다.

여기서 삿드(sad)는 묘(妙 불가사의)또는 정(正 바른)으로 번역 되어지는데 모두 훌륭한, 좋음과 같은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다르마(dharma)는 십계(十界), 십여(十如), 권실(權實)을 모두 망라한 법(法)을 말합니다.

푼다리카(pundarika)는 연화(연화)로 연꽃 중에서도 가장 존귀한 흰 연꽃을 지칭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건만 자신의 몸에는 한 치의 오염도 허락지 않는 흰 연꽃의 순수와 청결은 세속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법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묘법연화경이야말로 '경(經)중의 왕(王)'으로서 예로부터 대승경전의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2. 우주는 통일된 진리
1)우주만유의 참 모습
리가 살고 있는 우주만유의 차 모습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는데, 부처님은 이를 제법실상(제법실상)이라고 설하셨습니다. 방편품에서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상성체력작인연과보본말구경'(本末究竟)등의 열 가지 범주(十如是)로 생겨 움직인다고 하셨습니다.

옛부터 사물의 존재, 생기의 카테고리로 중요시해 온 십여시를 살펴보면 상(相)은 외적 모양, 성(性)은 성질, 체(體)는 구조, 력(力)은 잠재력, 작(作)은 작용, 인(因)은 원인, 연(緣)은 조건, 과(果)는 결과, 보(報)는 현실로 나타난 결과로 이들은 모든 사물에 똑같이 존재하는 일관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물이나 법은 각각 독립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이 십여시가 관계지어 서로 의존하여 생성 변화한 것으로 여기에서 '법화경'의 우주적 통일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묘법(妙法)이라고 하며 여기서 하나의 통일된 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없이 큰 과보(果報)와 갖가지 본성(本性)과 형상(形相)의 뜻은, 부처님과 시방(十方)의 제불(諸佛)들만이 알 수 있으며 어리석은 중생은 볼 수도 알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 보살들 중 신심의 힘이 굳건한 자만이 예외가 된다 합니다. 이에 천태대사는 십계(十界), 즉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하늘의 여섯길(六道)과 성문연각보살불의 네 성인(四聖)인 10여시와 삼종세간(三鐘世間) 즉 인간, 중생, 국토세간을 근거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설을 전개합니다.

여기서 6도는 깨닫기 전에 윤회하는 번뇌와 미혹의 세계이니 우리는 이를 깨달을 뿐 결코 믿을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성은 성인아라한부처의 세계로 부처와 육도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바로 부처는 악도 갖추었지만 악행을 절대 하지 않는 분이요, 지옥중생은 불성은 갖추어 있지만 부처와 같은 행위를 할 줄 모른다는 차이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무명(無明)을 스스로 제거하여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닫고 절대적 경지에 드신 분으로 여기에 나온 방편(다른 경에 설해진 여러 교리)은 진실 자체로 승화된 것입니다.

2)일승의 가르침과 삼승
일승(一乘)이란 일불승(一佛乘)을 이름하는데 모든 존재를 통합하는 수레란 뜻입니다. 승(乘)이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이는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법에는 소승대승3승의 구별이 있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은 하나뿐이고 또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승으로 '법화경'을 일승경 또는 일승의 묘전(妙典)이라 합니다.

이 일승은 부처님 최고의 궁극적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각 개개인의 근기나 소질, 능력에 따라 이승(二乘), 삼승(三乘)등 여러 가르침을 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모두 통합통일한 최고 절대의 진리를 설명하셨으니 여래가 무수한 방편을 가지고 연설한 것은 방편설(方便說)에 불과하고 일불승(一佛乘)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년 조그만  선행(善行)으로도 다 성불한다고 보증하셨는데 예를 들면 계율을 지키고 선정에 힘쓰는 수행자는 이를 것도 없고 사리를 모시기 위해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만들거나 꽃 한송이를 바치는 등 작은 정성으로도 성불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모든 번뇌를 끊은 아라한도 그대로 넘겨 볼수 없는 부처님의 경지, 그 어렵고도 어려운 일(難中之難事)를 불상에 고개 한번 끄떡한 인연으로 부처가 되리라 하신것과 비교해 이 양자 간에 엄청난 모순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사실 성불이라는 것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와 합일해 버리는 일이므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나 그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부처님의 자비가 크므로 이 난중지난사가 쉽고도 쉬운(易行中易行)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껏 삼승의 방편을 쓰셨던 것도 이 자비의 탓이니 부처님의 거두어들이시는 깊은 뜻을 우리는 깊이 되새겨야겠습니다.

3. 방편과 진실
1)방편(方便)의 의미
편(Upaya)은 한 마디로 말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하는 행위입니다. 즉 방(方)은 방법, 편(便)은 편리이니, 일체 중생의 기류근성(機類根性)에 계합하는 방법수단으로 편리하게 쓰는 것입니다.

또 방은 방정한 이치, 편은 교묘한 말로 여러 가지 기류에 대하여 순응하여 적당히 교화하는 편법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성불한 이래 여러 인연, 여러 비유, 여러 연고 등 무수한 방편을 쓴 것은 중생을 인도하여 그들이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심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근기가 성숙하지 못하여 깊고 묘한 교법을 받을 수 없는 중생을 깊고 묘한 진실도에 꾀어 들이는 권도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방편이고 하나의 부처로 이끄는 방편이므로 우리가 그 방편이 방편인 줄 알 때 부처의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불교는 모두 방편
성분(聲問), 연각(緣覺), 보살(菩薩)에게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6바라밀(Paramit-ta)을 가르쳐서 아라한벽지불이 되게 한 것은 모두 방편력에 의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일불승으로 교화할 뿐, 삼승의 가르침은 방편설이었다는 비유는 화성유품에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백 유순 험난한 악도(惡道), 광막하고 인적 끊겨 소름 오싹 끼치는 곳을 통해 보배가 있는 곳을 찾아가려고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중도에 싫증이 난 무리가 인도자에게 이르기를 '저희들은 지치고 두려워서 다시 더 못 가겠거늘 길은 멀고 머니,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옵나이다' 때에 그 인도자가 몹시 슬기로와 그 험한 길의 뚫리고 막힌 형세를 알아 그들의 무지를 가엾이 여겨 방편을 쓰는데,

험도 중 삼백 유순 지난 거리에 신통력으로 한 성(城)을 만들고 무리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두려워 말며 돌아가지 말라. 이제 이 큰 성에 머물러 무엇이나 뜻대로 할 수 있나니, 거기 들어가 편히 쉬고 다시 떠나라"

이에 지친 무리들이 크게 기뻐하며 "우리들 이제 악도 면하고, 마음껏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노라"하며 쉬자 인도자는 다시 피로함 없음을 알고 곧 화성 없애고 이르기를 "너희들 어서 가라. 보배 있는 곳 바로 가까웁다.

먼저 있던 큰 성은 내가 신통으로 만든 바 불도는 너무 머니 오래 고생하여야 이루어지니라" 이는 유명한 화성의 비유입니다. 험한 길(미혹)을 통과시켜 보배 있는 곳(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인도자가 부처님이요, 따라 나선 자가 우리들 불자이니, 이는 중생의 기근이 열등하여 도중에 좌절할 우려 있음을 화성(化城)으로 비유하여 이승의 열반을 설하신 것입니다.

화성을 이제 없애시고 보배 있는 곳이 가까우니 어서 가라고 격려하듯 삼승이 모두 일불승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고 진리를 깨닫도록 모두 진일보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4. 영원한 생명의 부처님
1)보살들의 출현
'법화경'은 영원한 생명의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유일의 경전입니다. 종지용출품에는 많은 지용(地通) 보살등(대표로 상행, 무변행, 정행, 안립행)이 대지에서 솟아 나옵니다.

이 보살들은 사바세계 아래 허공에 머무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며 아들로서 석가여래의 설하시는 법문을 듣고 아래로부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사바세계현세에서 힘차게 사는 인간, 바로 보살로서 우리는 불교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현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살이 영원한 부처님 앞에 많이 계시다는 것, 바로 우리 중생이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2)영원한 수명
영원한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여래수량품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오백 진점겁이라는 비유로 수명이 영원하심을 밝힙니다. 끝없이 영원한 시간을 표현하는 오백 천 만 억 나유타 아승지의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를 모두 갈아부셔서 한 개씩 옮겨도 아직 끝은 없고 무량무한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끝도 없는 옛날에 성불하셔서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설법하셨으니 어떤 때는 아미타불연등불, 어느 때는 석가모니불로 나타나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인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품에서 '나 실로 성불한 이래 구원(久遠)함이 이와 같고 영원히 머물러 멸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3)출세하심과 입멸의 본 뜻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뜻은 무엇이며 이 세상을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중생에게 불지견(佛智見)을 증득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또 부처님이 영원한 존재이시라면, 왜 열반(입멸)을 보이시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석가모니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만약 오래 오래 영원한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어리석은 중생들이 부처님에 의지만 하고 불도를 수행하려는 의지가 약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수량품을 보면 양의(良醫)의 비유가 설해집니다. '옛적에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병이라도 그 의사가 처방한 약만 먹으면 쉽게 나았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는데 한번은 그 의사가 이웃 나라에 볼 일이 있어 집을 비우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란을 피우고 놀다 약장 속에 있던 독약을 모르고 마셨습니다.

독이 돌아 배를 움켜쥐고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돌아와 서둘러 독을 없애는 약을 지어서 먹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정신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그 약이 좋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받아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게 하려고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좋은 약을 여기에 잘 둘 것이니 언제든지 꺼내서 마셔라, 마시기만 하면 병은 곧 나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 약을 마시도록 해라." 아버지는 다시 먼 나라로 떠난 후 자신이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거짓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야 아들들은 깊은 반성을 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먹기만 하면 잘 낫는다고 일러두고 가신 그 약을 마지막으로 받들어 먹었습니다.

그 약은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서 맛도 더 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독이 해독되어 마음도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도 돌아오셨고 건강과 평화를 되찿은 그 집안은 기쁨과즐거움으로 가득찼습니다.

만일 부모가 영생한다고 믿으면 과연 우리가 자립할 생각을 할 것입니까? 누가 능히 이 아버지 의사가 거짓말을 하였다고 탓하겠습니까. 부처님 또한 같아서 성불한 지 무량무변 백 천 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언마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장차 멸도에 들리라' 말하노니 아무도 법대로 거짓말을 하였다고 이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출현하셔서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智見)을 열어(聞) 보이고(示) 깨달아(悟) 들어가도록(入)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입멸의 모습을 보인 것은 중생들을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부처를 보았는가, 구원의 석가모니는, 있음(有)과 없음(無)에 집착하는 미혹한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은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연기(緣起)와 무상(無常)의 법칙이 지배하는 한 어떤 존재도 생멸을 못 면할 것은 뻔하나, 연기의 도리는 불멸일 수 밖에 없어 부처님의 영원성은 이 공(空)의 영원성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것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대립을 넘어 선 경지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사람만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