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시심마(是甚麽)란 대체 무엇인가?

내 마음의 법구

2009-10-12     김사인

‘이 뭣고?’라고, ‘무엇인가?’라고 칼끝을 들이댄다. 일러보라 한다. 냉한삼두(冷汗三斗). 한데 ‘무엇인가?’란 대체 무엇인가?

어린아이들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이건 뭐야?’ 하고 묻는다. 어른들은 일쑤 당혹스럽고 성가시다.

이른바 ‘어른’인 우리는 그 사물에 붙여진 이름을 가르쳐주거나 길게 용도를 일러주는 것으로 대답을 삼는다. 한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이건 뭐야?’는 본질을, 그것의 정체를 묻는 물음이 아닌가. 그 앞에 인간중심적으로 타성화된 ‘이름’들과 쓸모들을 늘어놓는 것이 과연 답이 되는가.

‘이건 뭐야?’라는 무구한 물음이 담고 있는 무서운 근원성과 청천벽력 같은 직접성[直指, 直入]을 오히려 미봉하고 무마하고 유예하고 오도하는 짓이 아닌가. 결코 답일 수 없는 것을 답이라고 들이대고 있는 형국.

어른들의 그런 ‘날개옷 더럽히기’에 길들면서 이 행성의 새 방문자들인 어린이들은 점차 총기가 흐려지고 몸과 마음이 둔탁해진다. 자신의 소종래(所從來)와 돌아갈 곳에 대한 감각을 마침내 모두 잊고,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신비감도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채, 약에 취한 사람처럼 주술에 든 사람처럼 뻘밭의 주민이 되어 뒹군다.

그 과정이 교육이란 이름, ‘철이 든다’는 미명 아래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울고 웃고 미워하고 애착하고 먹고 마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생을 구성한다. 이 별의 유력한 존재방식인 ‘육신으로서의 존속’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때 그들은(또는 우리는) 비로소 당황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앎이란 불가역(不可逆)의 ‘살아봤음’이 남긴 흔적이고, 그러므로 모든 앎은 불가피하고 유일한 앎일 것이므로, 먼저 산 ‘어른 사람’들은 저마다 제 깜냥의 앎에 기대어 ‘아이 사람’들에게 그리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우리는 교육과 철듦이라는 이름의 무지와 철면피 뒤에 무서움을 숨겨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광대무변을, 무한과 영원이란 이름의 저 이름할 수 없는 존재의 깊이들을 대면하는 것을 우리의 무의식이 실은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어른이 이미 날개옷을 잊은 선녀이거나 길 잃은 어린 왕자인 까닭에, 아무런 자각도 없이 그런 답일 수 없는 답을 아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늘어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물음은 구약성경에도 있어, 신을 향해 ‘Who are you?’-‘이 뭣고’와 다르지 않을-라고 묻는다. ‘이것이 뭐야?’라는, 무구한 듯하지만 실은 불칼 같은 물음. ‘이 뭣고?’라는 선가(禪家)의 삼엄한 화두. 한데, 이 일련의 물음들은 과연 물어질 수 있는 물음인가? 그것도 말로?(물어질 수 있기에 그 말이 있겠지만) 그런데, 그럴 수 있다면, ‘무엇인가?’란 말, 나아가 말 일반은 아마도 훨씬 무겁고 깊은 뿌리를 갖는 것일 듯하다.

사설이 길지만 이 또한 돌아보면 모두가 헛말, 나도 그대도 모르지 않는가! 오직 모를 따름이지 않겠는가! ‘무엇인가?’라는 한 벌의 언어도단을 온몸으로 세우고, 다시 또 온몸으로 그 천길 벼랑을 배밀어 가는 지렁이나 달팽이 한 마리를 다만 꿈꾸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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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충북 보은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1981년 「시와 경제」 창간동인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산문집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있고,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